그는 평범한 왕이 아니었다. 왕실의 핏줄을 타고났지만,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무수리였다. 형들은 정통성을 가졌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는 예상대로 흐르지 않았다. 아버지 숙종은 그를 멀리했으나, 형 경종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길이 열렸다. 1724년, 그는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왕이 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붕당이 나뉘어 서로 싸웠고, 백성들은 굶주렸으며, 왕조의 질서는 흐트러져 있었다. 왕은 스스로를 다스려야 했고, 신하들을 다스려야 했으며, 결국 나라를 다스려야 했다. 영조는 긴 호흡을 가다듬었다. 조선을 다듬는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탕평책, 싸움을 멈추게 하다
조선은 붕당의 나라였다.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이 나뉘어 서로를 견제했고, 왕권은 그들의 싸움에 휘둘렸다. 영조가 왕이 되었을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고민했다. 누군가 한쪽을 완전히 제거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을 화합시켜야 하는가.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탕평책(蕩平策).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당파 간의 균형을 맞추는 정책이었다.
노론과 소론을 균형 있게 등용했다.
당파 간 다툼을 줄이기 위해 탕평비(蕩平碑)를 세웠다.
특정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왕이 직접 신하들을 통제했다.
그러나 붕당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서로를 불신했고, 왕의 정책에도 반발했다. 영조는 강경하게 대응했다.
"붕당이 나라를 망친다. 조선의 주인은 너희가 아니라, 백성이다."
그는 때로는 회유하고, 때로는 탄압하면서도 끝까지 탕평책을 밀어붙였다.
그의 노력 덕분에 조선의 정치 구조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붕당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왕이 사라지면, 그들은 다시 싸움을 시작할 것이었다.
균역법, 백성의 무거운 짐을 덜다
영조는 궁궐을 벗어나 백성들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피로와 굶주림으로 가득했다.
조선의 경제 구조는 문제투성이였다. 양반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백성들만이 모든 부담을 짊어졌다. 군역(軍役)도 마찬가지였다. 군대에 나가지 않는 대신 내야 하는 군포(軍布)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었다.
영조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균역법(均役法). 군포의 부담을 기존의 절반으로 줄이는 정책이었다.
백성들이 내야 할 군포를 기존 2필에서 1필로 줄였다.
대신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어염세(소금과 물품에 대한 세금)를 부과했다.
일부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균역법은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양반들은 반발했다. 자신들이 세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일부 지방에서는 저항도 일어났다.
그러나 영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을 지키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규장각, 학문을 통해 조선을 바로 세우다
영조는 조선을 지식으로 다스리고 싶었다. 그 자신이 조선의 왕 중 가장 많은 어필(御筆, 왕이 직접 쓴 글)을 남겼다. 학문이 나라를 강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왕실 도서관이자, 학문 연구 기관이었다.
유능한 신진 관료들을 교육하는 공간이 되었다.
왕이 직접 학자들을 불러 토론하며 정치적 조언을 받았다.
규장각은 조선의 지적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정조가 이를 더욱 발전시키면서, 조선의 문화와 학문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사도세자의 비극, 그리고 영조의 상처
그는 훌륭한 왕이었으나,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의 아들, 사도세자는 왕이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기대는 너무 높았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영조는 점점 실망했다. 세자는 불안했고, 결국 정신적으로 무너져 갔다.
신하들은 이 틈을 이용했다. 왕과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고, 영조는 점점 아들에게 등을 돌렸다.
결국 1762년, 영조는 결단을 내렸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다.
8일 뒤, 세자는 숨을 거두었다.
그것은 영조가 평생 떠안고 가야 할 상처였다. 그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되었다.
이후 영조는 더욱 고독해졌다. 그는 조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나, 가정은 지키지 못했다.
그가 남긴 것들
영조는 52년 동안 조선을 다스렸다.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위에 있었던 왕이었다.
그가 남긴 것들은 조선의 뼈대가 되었다.
탕평책: 붕당 정치를 조정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균역법: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며 조선의 경제 구조를 개혁했다.
규장각: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신진 세력을 양성했다.
속대전(續大典): 조선의 법과 행정을 정리한 법전.
그는 조선을 강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가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왕이었다.
마지막 순간
1776년, 영조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은 이는 정조였다. 그는 영조의 개혁을 이어가면서도,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기리려 했다. 영조는 조선을 지킨 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왕으로서도, 아버지로서도 끝까지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떠난 후에도, 조선은 그의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늘 두 가지 얼굴로 남았다.
그는 훌륭한 왕이었을까? 아니면 잔혹한 아버지였을까?
그 질문은 여전히 조선의 역사 속에서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