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간에 끝내는 중국사 이야기1

  • 등록 2025.04.13 23:4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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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시(序詩) – 강물은 언제부터 물이었는가

말은 남는다. 피로 적고 불로 지운 말들. 어느 문명의 시작은 늘 전설로, 끝은 언제나 전쟁으로 쓰인다. 누군가는 신의 손에서 나라가 태어났다고 믿었고, 누군가는 벽돌 위의 기왓장처럼 그 나라가 허무하다고 웃었다. 그러나 강은 흘렀고, 흙은 사람을 키웠고, 시간은 무심히 사람의 이름을 지웠다.

 

강물은 언제부터 물이었는가?
하늘에서 떨어진 비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울음이었다. 굶주림과 욕망, 천명을 사칭한 권력자들의 명분이 땅을 파고, 그 물줄기가 되었다.

 

그 강 위에서 배를 띄운 것이 하나라면, 닻을 내린 것이 주나라였다. 그리고 칼을 빼든 이들은 수없이 그 물을 적셨다. 중국이라는 말은 넓지만, 넓다고 단순하지 않다.
그 속은 겹겹이 덧칠된 시간이며,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되지 않는 의지였다.

 

역사는 두꺼운 책이 아니다. 역사는 고개를 들고 바라본 하늘의 색이며, 말없이 걷던 행인의 뒷모습이다. 이 이야기는 그 뒤를 따라가 보는 짧은 산책이다. 어쩌면 발목을 잡는 긴 늪일지도 모른다.

 

이제, 시작해보자.
‘하’라는 이름의 나라가 과연 신화였는지, 아니면 우리가 너무 빨리 눈을 감았는지.

 

2. 하와 은 – 신화가 연대기가 되던 시절
기록은 늦게 오고, 신화는 먼저 왔다.
어느 민족이든 역사의 시작은 아득하다. 누가 처음 이 땅을 걸었고, 누가 처음 불을 지폈는지 아무도 확언하지 못한다. 다만, 중국의 첫 페이지에는 ‘하(夏)’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그것은 왕조였고, 동시에 전설이었다.

 

하나라는 이름의 창건자는 우(禹)였다. 사람들은 그를 홍수를 다스린 자라 불렀고, 그가 물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칼을 들지 않았고,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그는 걷고 또 걸으며, 흙과 물을 구분짓는 자였다. 홍수는 그에게 천하를 안겼고, 물길은 나라의 경계가 되었다.

 

하지만 하왕조는 빛보다 어둠이 먼저 왔다. 시간이 지나며 권력은 피로 물들었고, 마지막 왕 걸(桀)은 폭군으로 기억되었다. 걸왕은 부패했으며, 향락에 젖었고, 결국 하늘은 그를 버렸다. 백성의 신음이 하늘에 닿았고, 천명이 떠났다.

 

그 천명을 이은 것이 은(殷) 혹은 상(商)이었다. 상나라는 무정(武丁)과 부인 부호(婦好)로 대표되는 강력한 제사 국가였으며, 거대한 청동기와 거북 등껍질에 새긴 갑골문으로 기억된다.
이 갑골문은 신의 뜻을 묻는 글자였고, 동시에 인간의 불안이 남긴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신에게 물었다. “전쟁에 나가도 좋습니까?”, “내 아내는 아이를 낳을 수 있습니까?”, “올해 수확은 괜찮겠습니까?”

 

이 질문들은 천년이 지나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늘 물어본다.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길을 찾으려 한다. 은의 왕들은 그 답을 뼈와 불에서 구했고, 그로써 역사는 문자의 껍질을 얻었다.

 

은나라는 신의 뜻을 읽는 자들이 나라를 이끌었다. 그러나 신도 사람도 지쳤다. 마지막 왕 주(紂)는 스스로를 신이라 여겼고, 그의 욕망은 그를 삼켰다. 그의 곁에는 달기(妲己)라는 여인이 있었다. 백성들은 그녀를 마녀로 불렀지만, 사실 그건 권력을 향한 증오가 여인의 얼굴을 빌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잔혹한 형벌과 향락, 무리한 건축은 나라를 짓눌렀고, 다시 천명은 떠났다.

 

그 천명을 받아든 자가 바로 주나라였다. 무왕은 은을 무너뜨리며 말했다. “하늘이 새 뜻을 내렸다.”
이 말은 곧 수천 년을 이어갈 정당성의 기틀이 되었다.
‘천명’이라는 개념. 즉, 하늘이 왕에게 나라를 다스릴 권리를 준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역사는 묻는다.
과연 하늘은 말을 했는가? 아니면 칼이 말을 시킨 것인가?

 

은의 유산은 문자의 씨앗이었고, 제사의 의식이었으며, 인간이 두려움을 제도 속에 녹여낸 첫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두려워했고, 왕은 그 두려움을 지배했다.

 

우리는 그 왕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무거운 청동의 주발과, 불에 그슬린 등껍질의 글자들을 통해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신화는 언제나 연대기의 문을 두드린다.
그리고 그 문은 조용히, 피를 묻힌 손으로 열린다.

 

3. 주나라 – 천명이 머문 자리, 왕조의 설계도
천명은 소리 없는 왕이다. 누구도 보지 못했고, 누구도 직접 들은 적 없으나, 모두가 그 이름을 빌렸다. 누군가는 전쟁을 위해, 누군가는 혁명을 위해, 그리고 누군가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 이름을 불렀다. 주나라는 그 이름 위에 나라를 세웠다.

 

무왕은 은나라 주왕을 쓰러뜨리고, 하늘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선언했다. 그 말은 단순한 명분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였다. 천명은 전제군주의 폭력성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왕도 잘못하면 하늘이 버린다.”라는 이 단순한 전제가 통치의 정당성을 가르는 칼이 되었다.

 

그러나 무왕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진짜 설계자는 그의 동생, 주공(周公)이었다. 무왕 사후, 어린 왕이 즉위하자 주공은 섭정으로 나섰다. 권력을 빼앗지 않았다. 대신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고민했다. 그는 법을 만들고, 의례를 정비하고, 문장을 남겼다.
그의 손에서 나랏일은 종묘사직과 예악(禮樂)이라는 이름으로 분화되었다. 무기가 칼에서 ‘질서’로 바뀐 순간이었다.

 

주공은 백성을 단순히 다스리는 대상이 아니라, 설득하고 교육할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그는 “백성은 가르칠 수 있다(民可敎也)”라 믿었고, 덕(德)으로 다스려야 나라가 오래 간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단지 인자함이 아니었다. 덕이란 결국, 두려움을 덜고 신뢰를 쌓는 정치의 기술이었다.

 

주나라는 봉건제를 만들었다. 왕이 친족이나 공신에게 땅을 나눠주고, 그들로 하여금 각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이는 유사한 가치관과 혈통을 공유하는 작은 세계들을 한데 엮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체계는 시간이 흐르며 균열을 맞이한다.
가까웠던 혈연은 점차 낯선 이름이 되었고, 충성은 이익과 바뀌었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지만, 그늘은 비슷하게 진다.
처음엔 신뢰에서 시작된 봉건제는, 시간이 지나며 지방 제후들의 독립성과 자의식만 키워주었다. 왕은 점차 말뿐인 존재가 되어갔고, 권력은 점점 중심에서 멀어졌다.

 

이 시기에 생겨난 개념들이 있다. 예(禮), 악(樂), 충(忠), 효(孝), 신(信). 이들은 정치의 무기였고, 백성의 족쇄이기도 했다.
예는 질서를 만들었고, 악은 감정을 다스렸으며, 충과 효는 위계질서를 정당화했고, 신은 왕과 백성 사이의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너무 잘 짜여진 시계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기름을 요구했고, 조금의 모래만 있어도 멈출 수 있는 체계였다.

 

주나라의 마지막은 긴 여운처럼 사라져갔다. 서주에서 동주로, 수도를 옮기며 중심은 더욱 약해졌고, 제후들은 더 이상 왕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왕은 남아 있었지만, 권력은 떠났다.

 

주나라가 무너진 자리에 춘추와 전국이라는 이름의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제도 위에 모래를 뿌리고, 언어 위에 칼을 올려놓는다.

 

그러나 그 전에, 한 가지는 분명히 남았다.
세상이 왜 어지러운지를 질문하는 이들이 생겨났다는 것.
그들이 바로 공자였고, 묵자였고, 노자였으며, 장자였다.

 

그들은 흩어진 주나라의 잔해 위에 서서, 한 가지를 묻기 시작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4. 춘추전국 – 칼은 사라지고 논쟁이 시작되다
주왕은 여전히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제후들은 더 이상 그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중심은 남아 있었지만, 권위는 비어 있었다. 주나라의 빛은 남은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었고, 그 틈을 노려 일어난 것이 바로 춘추의 세계였다.

 

춘추는 계절이 아니다. 이름만 아름답고, 속은 전란이었다.
천하에는 수백의 제후가 있었고, 그 중 강한 자는 패자(覇者)라 불렸다. 천자의 이름을 빌려 전쟁을 정당화했고, 이익을 질서라 불렀으며, 강한 자가 예를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사람들은 웃었다. 힘 있는 자가 예를 논한다니, 아이러니였으나 모두 받아들였다.
예는 이미 덕이 아니라 장식이었고, 천명은 칼을 든 자의 것이었다.

 

그 혼돈 속에서 한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노나라의 낮은 벼슬, 사구(司寇)를 지낸 그 남자. 이름은 공자. 그는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를 예의 붕괴에서 찾았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질서란 바로 역할의 정확함에서 온다는 그의 말은, 혼란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어쩌면 가장 낯선 논리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상만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걷고 또 걸었다. 노나라를 떠나, 위나라를 거치고, 송나라로 넘어갔다.
그의 손에는 검이 없었고, 대신 논어(論語)가 있었다.
세상이 글로 바뀌는 첫 장면이었다.

 

그 시절, 또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묵자. 그는 공자와는 달랐다. 혈통이 아닌 실용, 예가 아닌 평등, 음악이 아닌 절약을 말했다. “겸애(兼愛), 비공(非攻).”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아야 하고, 전쟁은 금지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당대 제후들의 귀에는 낯설고도 불편했다. 그는 성(城)을 고치고, 무기를 제작하며, 전쟁을 막기 위해 병기를 만드는 역설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멀리, 한 사내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요한 산 속에서 흐르는 물을 보며 말없이 책을 남겼다.
도덕경(道德經).
노자(老子)는 세상을 다스리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두라고 했다. 그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로 시작해,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싸우지 말고, 개입하지 말고, 흐름에 맡기라고 했다.
공자와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둘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았다.
공자는 “내가 가르치는 것은 옛것”이라 했고, 노자는 “진리는 언어 밖에 있다”고 했다.
이 둘 사이에 중국의 사고방식이 생겨났다. 실용과 덕, 규범과 무위, 정제된 예와 흐르는 도가 서로를 보완했다.

 

그 사이, 진나라의 병법가 손무(孫武)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을 쓰고 있었고, 전국의 제후들은 점점 덩치를 키워가며 주나라의 껍데기를 벗어던졌다.

 

그리고 드디어, 춘추는 지나가고 전국(戰國)이 시작된다.
제후는 왕을 자칭했고, 전쟁은 예외가 아닌 일상이 되었다.
그들은 수레와 쇠칼로 무장했고, 농지를 쟁탈하고, 제도를 개편했다.
모든 것이 전쟁을 위한 것이었다.
세금도, 학교도, 도로도, 심지어 사상도.

 

사람을 키우는 일도 국가가 직접 했다.
제자백가(諸子百家).
이 말은 혼란 속에서 피어난 지식의 숲이었다.
법가는 말했다. “인간은 악하다. 법이 다스려야 한다.”
유가는 말했다. “인간은 가르쳐야 한다.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
도가는 말했다. “인간은 내버려둬야 한다. 자연이 스스로 이끈다.”
묵가는 말했다. “인간은 사랑해야 한다. 모두가 평등하다.”
병가는 말했다. “이길 수 있을 때 싸워라. 아니면 기다려라.”

 

이토록 많은 철학과 이념이 한 시대에 솟구친 일은,
전 세계 역사에서 유례가 드물다.

 

그토록 많은 생각이 나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전국은 진짜 전쟁의 시대로 들어간다.
진(秦), 제(齊), 조(趙), 연(燕), 초(楚), 한(韓), 위(魏).
일곱 나라가 천하를 다투고, 그 천하 속에서 새로운 개념이 자라난다.
국가, 군사, 관료, 형벌, 효율.

 

그리고 그 혼돈 끝에서, 마침내 하나가 태어난다.

 

하나를 위해 만 가지를 버린 나라.
그 이름은 진(秦)이다.

 

5. 진의 통일 – 하나를 위해 무너뜨린 만 가지
먼저 무너진 것은 성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전국은 피로 익은 땅이었다. 손이 익숙해진 것은 농기구가 아니라 칼자루였고,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적국의 언어를 경계해야 했다. 그러니 ‘하나’가 필요했다. 모두가 한글자를 쓰고, 한소리를 따르고, 한사람에게 무릎 꿇는 세계.

 

그 시작을 연 자가 진(秦)이었다.

 

진은 서쪽 끝에 위치한 야만의 땅이라 불리던 나라였다. 그러나 바로 그 변방에서 새로운 방식의 국정이 싹텄다. 귀족이 아니라 법이 통치했고, 혈통이 아니라 능력이 자리를 결정했다. 법가(法家)는 이 세계에 가장 어울리는 논리였다.
냉정했고, 계산적이었으며, 효율적이었다.
상앙(商鞅)은 진에서 법을 바로 세웠고, 농민을 병사로 만들었으며, 무장을 수확처럼 여겼다. 사람은 숫자였고, 법은 도끼였다. 공은 분배되고, 실패는 곧 처형이었다.

 

이런 체계 속에서 진의 군주는 하나의 괴물이 되었다.
그는 두려움과 존경을 함께 먹고 자랐으며, 마침내 스스로를 신이라 여기게 되었다.

 

진왕 정.
그는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불렀다.
황제라는 말은 없던 단어였다. 천자도 부족했고, 왕도 부족했다.
그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다. "처음이자 유일한 자"라는 뜻.
더 이상 하늘은 왕을 낳지 않았다. 이제는 황제가 하늘을 만들었다.

 

그는 글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했으며, 도로와 축조법, 무기 규격까지 하나로 만들었다.
지방마다 달랐던 풍속은 불탔고, 각기 다른 사상은 금서가 되었으며, 학자들은 구덩이에 던져졌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책은 불탔고, 유생은 묻혔다.
그는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과거를 지웠다.
기억을 통제함으로써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국경을 넘은 두려움을 벽으로 막으려 했고, 자신이 세운 제국이 두려움과 분열을 잊게 만들길 원했다.

 

그는 불사의 약을 찾아 바다로 사절단을 보냈다. 죽음을 믿지 않았고, 스스로를 하늘의 일부로 여기려 했다. 그러나 그 몸은 결국 한 명의 인간이었다.
시황제는 죽었다. 그리고 죽음을 숨겼다.
관은 도로 위를 떠돌았고, “황제는 아직 살아 있다”고 사람들은 중얼거렸다.
시체는 썩고 있었지만, 명령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권력은 공중으로 부서졌다.

 

그의 죽음과 함께 진은 무너졌다.
두 번째 황제 호해는 시황제만큼 두려움을 주지 못했고, 세상의 분노는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분출되었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시작되었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외침이 들불처럼 번졌다.
황제라는 이름은 단 한 세대밖에 버티지 못했다.
“하나”로 만든 제국은, 그만큼 빠르게 흩어졌다.

 

그러나 그는 남겼다.
그의 무덤 속에는 살아 있는 병사들이 줄지어 서 있고, 동서남북을 향해 창끝을 들고 있다.
병마용.
그는 죽어서도 제국을 지키려 했다.
그 망상의 크기는 생애보다 길고, 그 그림자는 천 년을 끌었다.

 

진은 무너졌지만, 그의 방식은 남았다.
한(漢)은 그 유산을 가져간다.
칼은 덮고, 유학을 입힌다.
사상과 제도는 조화를 입고, 제국은 다시 태어난다.

 

다만, 그것은 또 다른 질문의 시작이었다.
무엇이 더 오래가는가? 두려움인가, 신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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