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간에 끝내는 중국사 이야기2

  • 등록 2025.04.14 00:3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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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제국 – 황제라는 이름의 불씨
불은 꺼졌지만, 재는 뜨거웠다.
진나라의 유산은 재로 남았다. 제도는 그대로였고, 길은 연결되어 있었으며, 글자와 법은 아직 손에 익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서웠다. 한 번의 황제는 너무 무거웠다. 다시 천하를 하나로 묶는다는 일은, 마치 죽음을 두 번 겪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모였다.
진의 폭정에 반기를 든 자들, 천하의 이름 없는 장수들과 농민 출신의 병사들.
그들 사이에 두 인물이 있었다.
한 사람은 귀족의 후예로, 전략과 기품을 가진 유방(劉邦).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한 병사 출신으로, 강철처럼 휘어지지 않는 항우(項羽).

 

두 사람은 같은 전장에서 싸웠고, 같은 적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 적은 바뀌었다.
전쟁은 서로를 향했고, 유방은 기다렸고, 항우는 앞서 나갔다.
결국, 불처럼 타오르던 항우는 스스로를 태웠고, 유방은 재 위에 앉았다.

 

기원전 202년. 유방은 스스로를 한고조(漢高祖)라 칭하고, 한(漢)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진의 제도를 가져오되, 진의 폭력은 지우려 했다.
법가는 유지하되, 부드러운 겉옷을 입혔다.
그 겉옷의 이름이 바로 유학(儒學)이었다.

 

공자는 죽고 없었지만, 그의 말은 살아 있었다.
유학은 본래 철학이었지만, 이제는 정치가 되었다.
한무제(漢武帝)는 유학을 국학으로 삼았다.
“오직 유학만이 나라를 지탱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고, 그 이후 천 년 넘는 시간 동안, 공자의 말은 제국의 심장이 되었다.

 

유학은 도덕을 말했지만, 동시에 질서를 말했고, 복종을 말했고, 군신의 도리를 아름다운 말로 포장했다.
“충(忠)과 효(孝)”는 이제 가족과 국가를 연결하는 끈이 되었고, 황제는 단지 정치가 아니라 하늘의 대리인이 되었다.
천자.
다시 그 이름이 돌아왔다.
하늘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침묵을 통치의 언어로 바꾸었다.

 

한제국은 넓었다. 진보다 더 넓었다.
비단길은 서역으로 뻗었고, 장건은 말 위에서 황제를 대신해 모래를 건넜다.
강역은 확장되었고, 한족이라는 말이 뿌리를 내렸다.
한나라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를 ‘한인(漢人)’이라 불렀고, 중국이라는 이름의 첫 실체가 생겨났다.

 

그러나 확장은 곧 균열을 품는다.
무제 이후의 황제들은 점차 약해졌고, 환관과 외척, 관리와 농민 사이의 틈은 넓어졌다.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났고, ‘황건적(黃巾賊)’이라는 이름의 분노가 피처럼 번졌다.
“창고는 비고, 세금은 무겁고, 하늘은 멀다.”
백성은 이렇게 중얼거렸고, 한나라는 그 말에 무너졌다.

 

한나라의 마지막은 조용하지 않았다.
황제는 있었고, 명령도 있었지만, 칼은 이미 다른 자들의 손에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조조(曹操)였다.
그는 말을 타고 천자를 모셨고, 천자를 인질 삼아 전국을 누볐다.
그가 말하길, “나는 도적이 아니다. 다만 시대가 나를 원치 않았을 뿐.”

 

한제국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황제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불씨는 꺼진 듯 이어졌고, 그것이 다음 세대의 피를 부른다.

 

황제의 자리를 두고, 세 나라가 맞선다.
그 이름은 너무나도 익숙한,
위(魏), 촉(蜀), 오(吳).

 

그리하여, 다시 이야기의 결은 바뀐다.
의리와 배신, 충성과 야망, 형제와 적.
불씨는 다시 타오른다. 이번에는 세 갈래의 불로.

 

7. 삼국 – 찢긴 땅에 피어난 의리와 배신
하늘은 아직 한나라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하늘 아래 땅은 이미 세 갈래로 찢겨 있었다.
황제는 여전히 궁에 앉아 있었지만, 그 명령은 나아가지 않았고, 백성은 더 이상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이제 세상은 황제가 아닌 장수의 칼끝에서 갈라지고 있었다.

 

먼저 칼을 쥔 이는 조조(曹操)였다.
그는 시인의 눈과 장수의 심장을 함께 가진 자였다.
“나는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다스린다(挾天子以令諸侯).”
그의 이 한마디는 시대의 정당성을 쥐는 검이 되었고,
그는 북쪽을 통일하며 위(魏)의 기틀을 세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악인으로도, 영웅으로도 불렀다.
그가 너무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고, 너무 많이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맞선 이가 유비(劉備)였다.
한의 황실 핏줄을 자처했고, 늘 자기를 “천한 사람”이라 낮췄지만,
그 발걸음은 어디서든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덕을 말했고, 사람을 얻으려 했으며, 눈물로 신뢰를 사는 자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관우(關羽)가 있었고, 장비(張飛)가 있었다.
세 사람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통해 의형제가 되었고, 그 이야기는
마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전설처럼 퍼져나갔다.

 

촉(蜀)은 그렇게 태어났다.
유비의 손에, 제갈량의 머릿속에서.
제갈량. 그는 세상을 등지고 책 속에 숨어 있던 자였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세 번 찾아온 유비 앞에 마침내 문을 열었고,
그 순간부터 그는 촉이라는 이름의 바람을 설계했다.
전쟁은 그에게 정치였고, 외교였고, 운명이었다.
“출사표(出師表)”는 그의 피였고,
그의 한숨이 천하의 전략이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람일 뿐.
오장원에서 병을 얻고, 촛불처럼 사라져갔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별을 살피고 진을 펼쳤다.
‘사후에도 기를 움직인다’는 말이 남았지만,
그가 떠난 촉은 더 이상 길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오(吳).
강남 땅을 기반으로 세워진 또 하나의 세계.
손권(孫權)은 자신의 형 손책의 유지를 이어 받아 왕이 되었고,
그 아래 장강은 나라의 경계이자 방패였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오의 승리였고,
조조의 군선은 불에 탔으며,
세 나라는 그렇게 대치 상태로 굳어졌다.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세 나라는, 모두 스스로 붕괴했다.
위는 사마씨의 손에 넘어갔고,
촉은 유선의 무기력 속에 사라졌으며,
오는 점점 변해가는 권력 앞에 흔들렸다.

 

삼국은 그렇게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삼국이 끝나지 않았다.

 

관우는 충성의 얼굴이 되었고,
장비는 의리의 근육이 되었으며,
조조는 책략과 냉혹함의 상징이 되었고,
제갈량은 천재의 대명사로 남았다.

 

역사는 그렇게 소설이 되었고,
소설은 다시 민간의 신앙이 되었다.
삼국은 한 시대가 아니라,
오랫동안 살아 있는 이야기의 형태가 되었다.

 

그러나 천하는 다시 ‘하나’를 꿈꿨고,
그 다음, 진(晉)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는 그 단절을 메우려 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 이야기가 시작된다.
삼국의 기억 위에 덧칠된 또 하나의 도전,
진에서 수로, 넘어가는 물결 위에서.

 

8. 진에서 수로 – 길 잃은 제국, 강을 건너다
삼국은 끝났지만, 시작은 아니었다.
천하는 다시 하나가 되었고,
그 이름은 진(晉)이었다.
그러나 그 진은 ‘진시황’의 진(秦)이 아니었고,
어쩌면 시작부터 끝을 닮아 있었다.

 

사마의(司馬懿).
그는 조조의 그늘에서 시작해,
조조의 손자를 누르고, 결국 위나라의 실권을 움켜쥐었다.
그의 아들 사마소, 그리고 그의 손자 사마염이
마침내 위를 멸하고 진나라를 세웠다.
그러나 그 제국은 피로 지은 바벨탑이었다.
높지만 불안했고, 단단하지만 균열은 태어날 때부터 있었다.

 

서진(西晉)은 삼국을 하나로 합쳤지만,
그 하나는 모두가 원하던 하나가 아니었다.
황제는 있었지만, 친족은 땅을 나눠 가졌고,
왕은 왕을 견제하고, 형은 동생을 경계했으며,
무너진 삼국의 기억은 각자의 칼집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었다.

 

팔왕의 난.
왕족 여덟 명이 왕위를 두고 싸웠다.
왕을 죽인 것은 외적이 아니라, 피붙이였다.
궁궐은 피로 물들었고, 왕조는 이름만 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북방의 바람이 내려왔다.
흉노, 선비, 저, 강, 갈…
한족이 이방인이라 불렀던 이들이 남하했다.
그들은 서진의 빈 틈으로 밀려왔고,
사람들은 강을 건넜다.
하루 아침에 ‘중원’은 함락되었고,
황제는 낙양을 버리고, 장안에서 포로가 되었다.

 

그 후,
중국은 찢긴 거울처럼 조각조각 나뉘었다.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중국 역사에서 가장 불안정한 시대.
너무 많은 나라가 생겨났고, 너무 자주 왕이 바뀌었다.
백성은 깃발을 외울 시간도 없었고,
군주는 이름보다 칼을 먼저 배웠다.

 

그 시기 사람들은 절망과 피난 속에서도
하나의 질문을 품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 질문은 곧 문화와 언어, 정체성에 대한 고통스러운 탐색이었고,
그 잿더미 속에서 불교가 피어났다.

 

원래는 인도에서 건너온 신앙이었다.
그러나 중국은 그것을 자기 식으로 삼켰다.
명상을 제도화했고, 경전을 번역했으며,
석가의 침묵은 장자의 허무와 섞였고,
도교와 불교는 때로 충돌했고, 때로 같은 향을 피웠다.

 

불안한 제국의 가장자리에서
사람들은 절을 짓고, 부처를 조각하며,
세속의 피를 씻으려 했다.
이제 강은 권력의 경계가 아니라,
신앙의 여정이 되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동진(東晉)이 세워졌다.
서진의 망명 정부였고, 바다를 등진 제국이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아남았지만,
그곳엔 중원의 힘이 없었다.
문인은 남았지만, 군사는 줄었고,
책은 넘쳤지만, 칼은 무뎠다.

 

그리고 그렇게,
중국은 오랫동안 북과 남으로 갈렸다.
북쪽은 이민족의 땅이 되었고,
남쪽은 문화의 섬이 되었다.

 

길을 잃은 것은 제국만이 아니었다.
사람들도, 이름도, 사상도
방향을 잃고 떠돌았다.

 

그러나,
강을 건넌 이들이 언젠가 강을 다시 넘을 것이다.
그날을 준비하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의 제국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제국은 무력으로 강을 넘었고,
말 위에서 황제를 맞이했다.

 

그 이름은 수(隋)였다.
짧지만 강력했고,
마치 예고편처럼,
진짜 이야기를 예열하고 있었다.

 

9. 당 –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그리움이 쌓이다
꽃은 피고, 또 졌다.
그러나 당(唐)의 꽃은 좀 달랐다.
그 꽃은 강 위가 아니라 천하 위에 피었다.
그리고 피어 있는 동안, 누구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당나라는 수나라의 그림자에서 태어났다.
수(隋)는 강력했고, 빠르게 무너졌다.
대운하를 열고, 민심을 닫았고, 천하를 통일했지만,
정작 그 천하는 황제의 무덤이 되었다.
양제는 사치와 건축으로 세상을 질리게 했고,
그 피로 당의 기회는 찾아왔다.

 

이연(李淵).
그리고 그의 아들 이세민(李世民).
그들이 창건한 당나라는 단순한 왕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 그 자체였다.

 

이세민은 즉위 후 태종(太宗)이 되었고,
그는 정치를 예술로 만들었다.
현실주의자였고, 냉철한 계산가였으며,
또한 자신보다 유능한 신하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위징, 방현령, 두여회, 장손무기…
그들의 이름은 정사의 가슴에 금박처럼 남았다.

 

그가 남긴 정치의 이상형은
‘정관의 치(貞觀之治)’라 불린다.
법과 예가 조화를 이루고,
관료와 백성이 함께 숨 쉬던 시절.
그것은 중국이 상상할 수 있었던 최고의 정치였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당은 넓어졌다.
실크로드는 당의 대로가 되었고,
서역은 당의 이마가 되었다.
사막 너머의 나라들이 경배를 위해 찾아왔고,
장안은 세계의 수도였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우주였다.
모든 종교가 공존했고,
이국의 언어가 시장에서 넘쳤으며,
낙타와 향신료와 문서가 길을 공유했다.
불교, 도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까지
모두가 이 대륙 위에서 말을 걸었다.

 

그 문화의 정점에는 시(詩)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의 중심에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있었다.

 

이백은 시인이기 전에 유랑자였다.
술을 벗 삼고, 달을 친구 삼았으며,
황제 앞에서도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시는 마치 칼끝 같았고,
단 한 줄로 하늘을 찌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장안에 가면 이백을 알지 못하는 자 없다.”

 

반면 두보는 삶의 깊은 그늘을 걷는 자였다.
그는 굶주렸고, 떠돌았으며,
전란 속에서 민초들의 신음을 기록했다.
그의 시는 노래가 아니라 기도였고,
그 문장은 비명처럼 묻혔다.
그의 시는 후대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천하의 기록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렇게 찬란했던 제국도
하늘의 뜻을 독점할 수는 없었다.

 

안녹산(安祿山).
당의 장군, 그러나 당의 배신자.
그가 일으킨 반란은
당을 둘로 찢었다.
‘안사의 난’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당의 심장을 찢은 전쟁이었다.

 

도시는 불탔고, 궁은 무너졌으며,
황제는 피난길에 어머니를 잃었고,
사람들은 시를 잊고,
칼만 기억했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양귀비(楊貴妃)가 죽었다.
가장 사랑받았던 여인,
가장 미움받았던 이름.
황제의 슬픔은 제국을 구하지 못했다.
그녀의 죽음은 단지 이야기로 남았다.
그 이야기는 다시 시가 되었고,
시가 된 사랑은 천년을 울렸다.

 

그 이후 당은 다시 일어섰지만
이미 그곳은,
이백이 술을 따르던 제국이 아니었다.

 

세금은 무거워졌고,
지방은 스스로를 왕이라 여겼으며,
황제는 점점 허수아비가 되어갔다.

 

그렇게,
당은 오래 살아남았으나
죽는 법을 잊었다.

 

그리고
혼란은 다시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이번에는 더 조용히,
그러나 더 오래 이어질
분열의 시간이 시작된다.

 

10. 송 – 바느질하듯 이어붙인 문명의 옷감
당은 무너졌다.
무너졌지만, 그렇게 한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마치 낡은 옷이 천천히 해지듯,
문명의 가장자리가 조금씩 풀리며
제국은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잃어갔다.

 

그 틈 사이로,
새로운 이름들이 스며들었다.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
이름만 들어도 아득한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
황제는 많았지만, 하늘은 말이 없었고
천하는 좁은 땅 위에 구겨진 채로 존재했다.

 

그러다 마침내,
또 하나의 이름이 등장한다.
송(宋).

 

조광윤(趙匡胤).
말 위에서 황제의 옷을 입은 사내.
그러나 그 옷을 피로 적시는 대신
술잔을 건넸다.
진정시키는 한마디,
“네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가족이지 않은가.”
그는 장군들의 군권을 회수했고,
무력보다는 행정과 문치의 시대를 열었다.

 

송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싸우지 않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대신,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호했다.
학문.
예술.
철학.
글.

 

송나라에서 가장 강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붓이었다.
그 붓은 사서삼경을 새롭게 해석했고,
주희(朱熹)는 유학을 다시 만들었다.
성리학(性理學).
세상은 원래 질서가 있고,
사람은 그 질서를 깨달아야 한다는 믿음.
그것은 삶을 설명하는 학문이자,
통치를 정당화하는 철학이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책이 태어났고,
그 책들은 도서관을 넘고,
집안의 책상까지 들어왔다.
과거제는 강화되었고,
누구나 글만 잘 쓰면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문명은 그렇게 평평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평평함은 언제나 경계를 불러온다.

 

북쪽의 거대한 기마 민족.
거란.
송은 그들에게 조공을 바쳤고,
스스로를 ‘작은 제국’이라 불렀다.
그 조심스러운 외교는 일시적 평화를 가져왔지만,
그 평화는 침묵 위에 놓인 종이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여진족이 들이닥쳤다.
금(金).
북송은 함락되었고,
황제는 포로가 되었다.
‘정강의 변(靖康之變)’.
한 나라가 북쪽 절반을 잃고
황제는 쇠사슬에 묶여 북쪽 땅을 끌려갔다.

 

그러나 송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쪽에서 다시 일어섰다.
남송(南宋).
강남의 따뜻한 기후,
부유한 도시,
그리고 살아남겠다는 의지.

 

그 속에서 또 한 명의 영웅이 태어났다.
악비(岳飛).
그는 오직 북벌을 꿈꿨고,
“환우리강산(還我河山)”이라 외쳤다.
그러나 그의 칼끝은 적보다
자국의 궁정을 찔렀다.

 

악비는 황제의 명으로 죽었고,
그의 죽음 위에 평화가 내려왔다.

 

그리고 또 한 세기.
문명은 이어졌다.
그림과 글씨는 더욱 정제되었고,
백자는 찬란하게 빛났으며,
산수화 속에서 사람들은 전쟁을 잊었다.

 

그러나 멀리,
초원 위에서 하나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은
도시도, 문명도, 철학도
모두 무시하는 속도와 파괴의 이름이었다.

 

그 바람의 중심에는
한 이름이 있었다.

 

몽골.

 

그리고, 그들은 곧 중국으로 달려온다.
그들은 싸우지 않는 제국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리고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자들이었다.

 

11. 원 – 말을 타고 온 유목의 제국
먼저 먼지가 보였고,
그다음엔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엔 말발굽 소리가 섞여 있었다.
문명은 그것을 피하려 했고,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몽골.
초원의 바람이 한반도와 페르시아,
유럽 동쪽 끝까지 미친 것은
정복이 아닌 속도의 문제였다.
그들은 설명하지 않았고,
설명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중국은 처음으로
자신보다 더 큰 세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바람의 심장은 칭기즈 칸.
그의 손자는 마침내 중국에 닿았다.
쿠빌라이.
그는 더 이상 유목민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완전한 중국인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원(元).
큰 근원, 처음의 시작.
그 이름은 스스로가 ‘한족 제국의 계승자’가 아닌
‘세계를 품은 중심’임을 말하는 선언이었다.

 

그는 대도를 수도로 삼았고,
중국을 다시 북쪽으로 끌어올렸다.
유학은 허락받았고,
불교는 우대받았고,
이슬람은 함께 숨 쉬었다.

 

그러나 위계는 철저했다.
몽골인, 색목인, 한인, 남인.
출신에 따라 법도, 기회도 달랐다.
중국은 처음으로
자신이 중심이 아닌 나라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문화는 멈추지 않았다.
잡기 힘든 변화 속에서,
이야기는 사람들을 붙잡았다.

 

《서유기》,
《삼국지연의》,
《수호전》
모두 이 혼돈 속에서 뿌리를 냈다.
민중은 더 이상 역사서 속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야기 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장강을 건너는 도적들,
하늘로 향하는 손오공,
의리를 품은 유비와 조조는
실패한 국가의 균열을 메우는
정서의 실이 되었다.

 

그리하여 몽골은 정복했지만,
그 땅은 완전히 복속되지 않았다.

 

무너진 송의 영혼은
문자와 이야기 속에서 부활했고,
그 이야기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정체성으로 빚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몽골은 멀어졌다.

 

황제는 옥좌에 있었지만,
정치는 기울었고,
세금은 무거워졌고,
기근은 반복되었고,
홍건적이라는 이름의 민중의 분노가
강가에서, 산속에서,
바람을 타고 번져나갔다.

 

그때, 한 사내가
농민의 옷을 입고,
승려의 발로 걷고,
황제의 꿈을 꾼다.

 

그의 이름은 주원장.
그는 가난했고,
굶주렸고,
배운 것도 없었지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를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었다.

 

그는 몽골을 무너뜨렸고,
자신의 이름으로
명(明)이라는 새 아침을 열었다.

 

유목의 제국은 사라지고,
다시 문명의 자존심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그 자존심은,
때로 빛보다 그림자를 길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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