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간에 끝내는 중국사 이야기3

  • 등록 2025.04.14 06: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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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명 – 검은 벽돌과 붉은 용포의 찬란함
벽돌이 쌓였다.
검은색이었다.
그 위엔 사람의 이름도, 피도 없었다.
다만 질서만이 있었다.

 

주원장(朱元璋).
거지는 황제가 되었고,
구걸하던 손으로 칙령을 썼다.
그는 땅의 끝에서 올라와
하늘의 중심이 되었다.

 

명(明).
밝을 명.
해와 달이 함께 있는 글자.
그는 어둠의 시대를 걷어낸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택했다.
그러나 밝다는 것은
무엇이 어두운지를 알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명나라는 원을 부정하면서도
그 유산을 정교하게 재편했다.
관료제는 더 치밀해졌고,
조세 제도는 더 정교해졌다.
백성은 땅을 얻었고,
황제는 법 위에 섰다.

 

주원장은 법을 믿지 않았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고,
오직 자신만을 믿었다.
수천 명의 대신이 숙청되었고,
공신들은 반역자로 몰렸다.
그는 역사를 두려워했고,
역사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 중심의 독재적 제국을 설계했다.
삼사(三司)는 나뉘었고,
이십삼부(二十三部)는 정비되었으며,
감찰, 형벌, 세금까지
모든 것이 황제의 눈 아래 놓였다.

 

그 눈은 열려 있었지만,
입은 닫혀 있었다.

 

그의 손자는 일찍 죽었고,
그의 손자의 아들은 강했다.
영락제(永樂帝).
명나라의 진정한 확장기였다.
그는 북벌을 감행했고,
수도는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겨졌으며,
자금성은 그 중심에 세워졌다.

 

그곳은
용포가 스치는 곳이었고,
사람이 사라지는 곳이었다.

 

영락제는 또한
한 사내에게 세계를 건네준다.
정화(鄭和).
환관이자 함대의 주인.
그는 인도양을 가르고,
동아프리카에 닻을 내리고,
무역이 아닌 권위의 자취를 남겼다.

 

명은 바다를 열었다.
그러나 그 바다는 이내 닫혔다.

 

그들은 넓은 세계를 보았고,
그 세계가 위험하다는 것도 알았다.

 

명은 다시 자신의 벽 안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책을 정리하고,
자기 자신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찬란함은 점점 무거워졌다.
관료는 늘었고, 보고는 쌓였으며,
결정은 멈췄고,
황제는 그림자가 되었다.

 

말 없는 황제들.
책을 피는 대신 술잔을 들고,
거대한 제국은 정지된 채 회전했다.

 

동창(東廠)과 서창(西廠).
비밀 경찰이 대화를 감시했고,
사람들은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그 빈틈으로
다시 북쪽에서 바람이 불었다.

 

만주.
그들은 말을 탔고,
고요하게 다가왔으며,
자신들의 언어로 “천명”을 말하기 시작했다.

 

명은 그 바람을 막기 위해
스스로의 문을 닫았고,
사람들 위에 세금을 얹었고,
성곽을 더욱 높였지만
그 높이는 두려움의 길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장수, 이자성(李自成).
그는 다시 백성의 이름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명은 스스로 붕괴했다.
황제는 자금성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았고,
그 검은 벽돌 위로
하얀 천이 바람에 날렸다.

 

그렇게
명은 스러졌고, 청이 들어왔다.

 

다시, 중국은 이방인의 이름을 받아들인다.

 

이번엔
더 길게, 더 깊게.

 


13. 청 – 비단 옷 위로 내린 마지막 눈발
눈은 소리 없이 내렸다.
그것은 말발굽도, 북소리도 없었다.
청(淸)은 그렇게 왔다.
한족의 명나라가 스스로 무너진 자리,
그 틈으로 만주의 바람은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들은 말을 탔고,
변방의 언어를 썼으며,
머리를 반쯤 깎고 땋은 변발로
중원의 천하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그들이 택한 첫 행보는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었다.

 

청은 명의 제도를 받아들였고,
한족 관료를 등용했고,
공자와 주자를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은 정복이 아니라,
포용을 위장한 통제였다.

 

강희제.
소년 황제였지만,
그의 눈은 가장 넓었다.
그는 내치와 외교, 전쟁과 학문을 함께 다뤘다.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타이완을 정복하고,
러시아와의 조약을 맺고,
지식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의 치세는 곧 아들 옹정제로 이어졌고,
그의 뒤를 이은 건륭제는
마침내 청의 정점을 만들었다.
그는 직접 시를 썼고,
문화의 황금기를 열었으며,
서역까지 그 깃발을 넓혔다.

 

그러나 정점이란
언제나 쇠퇴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건륭제 말년,
청은 이미 너무 크고,
너무 무거워져 있었다.

 

부패는 관청 깊숙이 배었고,
민심은 세금 아래 눌렸으며,
개혁의 손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강 바깥에서 다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영국.
그들은 차(茶)를 원했고,
은을 잃었으며,
아편을 가져왔다.

 

그리고 청은
아편을 막지 못했다.

 

1840년,
아편 전쟁.

 

서양의 증기선은
전통의 강을 건너왔고,
청은 굴욕의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로
중국은 한 번도 이전의 중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홍장, 위안스카이, 변법, 양무…
수많은 시도는 있었지만,
칼보다 빠른 기술,
사상보다 앞선 자본은
제국의 허리를 꺾었다.

 

청의 마지막 황제는
소년 푸이(溥儀)였다.
그가 자금성에 머무는 동안,
천하는 이미 군벌과 외세의 발 아래 나뉘어 있었다.

 

1911년,
신해혁명.
쑨원의 이름 아래
황제의 시대는 끝났다.

 

푸이는 조용히 물러났고,
비단 옷 위로 내리던 눈은
마침내 녹았다.

 

청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였다.

 

그들이 남긴 것은
강제된 전통,
늦은 근대화,
그리고 ‘중국’이라는 이름을
다시 정의해야 할 운명이었다.

 


14. 근대 – 제국의 무릎이 꺾인 날들
무릎이 꺾였다.
그것은 외세의 총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먼저 꺾인 것은, 스스로의 신념이었다.

 

천자는 더 이상 하늘의 뜻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지는가?”
“왜 저들은 이기는가?”

 

무너진 왕조의 재는 아직 식지 않았고,
공화의 불씨는 너무 작았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쑨원(孫文)은 황제를 끌어내렸지만,
황제가 사라진 자리엔
질서가 아닌 공백이 남았다.

 

중화민국.
이름은 ‘중화’였지만,
그 중심은 없었다.
각지의 군벌들이 각자의 국기를 흔들었고,
총구는 더 이상 외세가 아니라 서로를 향했다.

 

북양군벌, 봉천군벌, 안휘군벌…
이름보다 빠르게 바뀌는 얼굴들.
그들은 황제보다 더 절대적이었고,
백성은 다시 전쟁을 피해 걸었다.

 

한편, 남쪽에서는
쑨원이 당을 만들고,
사상을 말하고,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외쳤다.

 

그 목소리는 강했고,
그 외침은 컸지만,
총구 앞에서는 자주 꺾였다.

 

1925년,
쑨원은 죽고,
그의 뒤를 이은 이는
장제스(蔣介石).

 

그는 북벌을 단행했고,
중국을 하나로 묶으려 했으며,
한때는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상이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

 

그는 농민 속에서 붉은 깃발을 들었고,
혁명은 도시가 아닌 시골에서 시작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
같은 이상을 품은 듯 시작되었지만,
곧 총을 겨눴고,
중국은 다시 피로 물들었다.

 

장정(長征).
마오의 공산군은 도망치듯 걷고,
그 걷는 길 위에서
혁명은 강해졌고,
신화는 만들어졌다.

 

1937년,
일본이 다시 침공했다.
중일전쟁.
총소리는 베이징에서 시작해
중국 전역으로 번졌고,
한때 싸우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어색한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총구는 다시 서로를 향했다.

 

1945년,
일본이 물러나자
내전은 다시 시작되었고,
1949년,
베이징의 천안문에서
한 남자가 일어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합니다.”

 

중국은 붉어졌다.

 

장제스는 타이완으로 떠났고,
국민당의 꿈은 섬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 붉은 제국 또한
이상만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새로운 중국,
새로운 모순이 시작된다.

 


15. 중화민국과 공산당 – 말이 총보다 강했을 때
총은 한 번 사라졌고,
그 자리를 말이 메웠다.
혁명은 승리했지만,
평화는 시작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위에서 붉은 깃발이 휘날렸고,
마오쩌둥은 천하에 말했다.
“인민이 일어섰다.”

 

그러나 일어난 인민은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자유로운 투표도,
땅의 소유도 아니었다.

 

그들은
“계급”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웠고,
“노동”과 “혁명”이라는 교과서를 읽었다.

 

이제
총보다 말이 강해졌다.

 

한 마디 구호가
한 사람의 생과 사를 갈랐고,
비판은 무기였으며,
침묵은 죄였다.

 

1950년대,
토지개혁.
지주는 숙청되었고,
소작농은 땅을 얻었다.
그러나 그 땅은 곧
국가의 것이 되었다.

 

1958년,
대약진운동.
철을 녹이고,
곡식을 몇 배로 생산하겠다며
인민은 굶주렸고,
수천만이 죽었다.

 

숫자는 침묵했고,
말만 살아남았다.
거짓 보고, 과장, 충성 경쟁.
모두 말이었다.

 

그 말들은
총알보다 더 깊게
사람들을 꿰뚫었다.

 

그리고,
1966년.
문화대혁명.

 

다시
총은 책장을 향했고,
말은 책을 태웠다.

 

“사상”이 적이 되었고,
“지식”은 불순한 것이 되었으며,
“과거”는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학생들은 교사가 되었고,
아이들은 부모를 고발했고,
홍위병은 붉은 완장을 두르고
거리마다 구호를 외쳤다.

 

“마오 주석 만세.”
“반동분자 타도.”
“비판, 투쟁, 개조.”

 

말은 법보다 강했고,
법은 없었다.

 

한 나라가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며
미래를 약속했다.

 

그 약속은,
붕괴의 그림자를 숨기지 못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그의 죽음은
천하의 말이 갑자기 멈추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다시 한 사람이
말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덩샤오핑.

 

그는 말보다
숫자를 믿었다.

 


16. 그리고 혁명은 계속된다 – ‘중국’이라는 질문
혁명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혁명은 옷만 바꿔 입었다.
구호는 사라졌고,
시장이라는 이름이 그것을 대신했다.

 

덩샤오핑.
그는 말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이념은 침묵했고,
성장은 목표가 되었고,
중국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단단하게.
조용하지만 멀리 가는 발걸음으로.

 

공장은 연기와 함께 깨어났고,
논밭은 도시가 되었고,
농민은 노동자가 되었고,
자본은 ‘사회주의’라는 간판 아래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흐름 속에서도
질문은 계속되었다.

 

중국은 누구인가.

 

수천 년 동안
왕조가 바뀌고,
외세가 들어오고,
사상이 떠나고 돌아왔지만,
그 이름은 항상 ‘중국’이었다.

 

공자가 그려낸 예의 나라,
진시황이 통일한 철의 제국,
이백이 노래한 시인의 세상,
마오가 뒤엎은 농민의 나라,
덩샤오핑이 부활시킨 경제의 대륙.

 

그 모든 이름은
모순으로 연결된다.

 

자유를 외치면서 통제를 강화하고,
공동체를 말하면서 격차를 확대하며,
전통을 보존하며 미래로 달려간다.

 

21세기의 중국은
더 이상 과거의 복사본이 아니다.

 

인공지능, 양자 컴퓨팅, 우주 진출,
그리고 감시, 검열, 전략적 침묵.

 

하늘을 나는 드론이
황허 강 위를 지나고,
전통극의 무대 뒤에서
빅데이터가 춤을 춘다.

 

그 속에서
중국은 지금도 질문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무엇을 향해 가는가?”

 

그리고 그 물음은
역사책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고요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 질문이 멈추지 않는 한,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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