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정성공과 한족 이주 — 귀명항청과 새로운 충돌
1661년 봄, 거센 바람과 검은 파도를 뚫고 수백 척의 군선이 남중국해를 가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배마다 노쇠한 병사들과 갓 징발된 농민들, 식량과 무기가 실렸다. 그들의 목적지는 명확했다.
대만 — 잃어버린 이상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거점.
그들을 이끈 이는 정성공(鄭成功), 명나라 충신이었다.
명나라는 이미 북경에서 무너졌고, 남부의 마지막 저항도 꺼져가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단 하나였다 — 반청 복명(反清復明).
대만은 그 꿈을 위한 무대가 될 운명이었다.
정성공의 함대는 타이난 인근에 상륙했고, 네덜란드군은 젤란디아 성에서 결사 항전했다.
9개월간의 포위전 끝에 성문은 열렸다.
네덜란드 깃발은 내려오고, 정성공의 군대가 섬을 장악했다.
이로써 유럽 열강의 시대는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정성공의 이상과 현실은 곧 충돌했다.
그는 대만을 명나라의 임시 수도, 복명 운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섬 전체에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청조 관복을 금지하며, 중앙 집권적 군정을 수립했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섬의 내부는 이미 변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네덜란드 식민 시기 동안 한족 이민이 급속히 증가했었다.
남중국 푸젠 지역 출신의 상인과 농민들은 대거 대만으로 건너왔다.
그들은 삼림을 개간하고, 논을 일구며, 이미 자율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이상보다는 땅과 생계에 있었다.
정성공 정권의 중앙집권적 통치는 곧 이들과 마찰을 빚었다.
새 정부는 토지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시도했고, 세금과 군역을 강제했다.
이에 대해 한족 농민들은 반발했다.
특히 개척 초기의 토지 사용권을 두고 군정과 민간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한편 원주민 사회도 혼란에 휩싸였다.
정성공은 원주민에 대해 복속과 협력을 요구했다.
일부 부족은 군정과 타협했지만, 다른 부족들은 산악 지대로 물러나 저항을 지속했다.
원주민들은 다시금 외부 권력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통제당하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정성공 자신도 이러한 내부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갖지 못했다.
1662년, 섬을 장악한 직후부터 그는 대륙 반격을 준비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듬해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정경(鄭經)이 뒤를 이었다.
정경 치하에서 정씨 정권은 보다 현실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
대만 내 농업과 상업을 발전시키고, 외교적으로는 일본·동남아와 교역을 확대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군정의 억압적 성격이 남아 있었고, 민심은 완전히 안정되지 못했다.
또한, 청조는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청 정부는 정씨 정권을 불안정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해상 봉쇄와 군사 압박을 강화했다.
대만은 점차 고립된 섬으로 몰려갔다.
1683년, 청조는 마침내 대규모 해상 원정을 감행했다.
시랑(施琅)이 이끄는 청 해군은 정씨 정권을 격파했고, 대만은 청 제국의 품으로 들어갔다.
정씨 정권은 막을 내렸고, 섬은 새로운 지배 체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남긴 것은 단순한 권력 교체 이상의 의미였다.
한족 이민은 정착을 넘어 주류 사회로 성장했고, 원주민 사회는 또 한 번 후퇴를 강요받았다.
대만은 더 이상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중국 대륙과 연결된 경제·문화적 공간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한 시대가 끝났지만,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을 품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섬의 정체성이라는 복잡한 씨앗이 이 시기 심어졌다는 사실이다.
이 섬은 이제 단순한 땅이 아니었다.
기억과 저항, 이상과 생존이 얽힌 거대한 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무대는, 앞으로 더 격렬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맞이하게 된다.
5장. 청조의 통치 — 중앙집권과 저항
섬은 다시 한번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1683년, 청 제국의 깃발이 대만 해안에 올랐다.
그 순간, 바람은 다른 방향으로 불기 시작했다.
청군의 승리는 단순한 군사적 점령이 아니었다.
대만은 처음으로 중국 중앙 정권의 행정적 틀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경계는 언제나 애매했다.
청조 스스로도 이 섬을 완전한 내부로 보지 않았다.
애당초 강희제는 대만을 포기하라는 목소리마저 들을 정도로 섬에 대한 피로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라는 인식이 우세했고, 섬은 청의 변방으로 편입되었다.
청조는 대만을 푸젠성 아래 하나의 부속 행정구역으로 설정했다.
행정관과 군사를 파견했지만, 중앙집권적 통제는 육지에서만큼 강력하지 않았다.
육지의 관료들은 종종 임시직처럼 파견되어 현지 사정을 깊이 알지 못했다.
그 틈새에서 지방 세력과 한족 지주층이 권력을 형성했다.
청의 통치 아래에서도 한족 이민은 계속 증가했다.
푸젠과 광동 지역에서 농민과 상인, 노예, 범죄자들이 대만으로 밀려들었다.
대만의 비옥한 평야는 새로운 희망의 땅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주민들이 늘어날수록 원주민과의 충돌도 심화되었다.
원주민들은 청조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평야 지대는 점차 한족 농민에 의해 점령되었고, 원주민들은 산악 지대로 밀려났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소규모 전투와 저항이 이어졌다.
청조는 '생번(生番)'과 '숙번(熟番)'이라는 차별적 분류 체계를 도입해 원주민을 관리하려 했다.
순응한 부족에는 세금과 보호를 약속했지만, 저항하는 부족은 군사적 강제에 노출되었다.
섬 내부에서는 또 다른 갈등이 자라고 있었다.
한족 이민자들 간의 분파 경쟁.
푸젠계와 광동계, 서로 다른 방언과 관습을 가진 이들은 종종 충돌했다.
마을 단위로 서로 다른 조직을 형성했고, 때로는 무장 충돌까지 벌어졌다.
대만은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분열적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청조 당국은 이를 통제하려 애썼다.
금전적 지원과 군사력을 이용해 강압적 통치를 시도했지만, 현지 관료들의 부패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세금은 가혹하게 징수되었고, 민간 불만은 곳곳에서 폭발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만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이 반복되었다.
1721년, 대규모 농민 반란이 발생했다.
주이구이(朱一貴) 사건 — 그는 스스로 '대왕'을 칭하며 민중 반란을 이끌었다.
비록 청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는 대만 사회 내부의 불만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반란은 단절된 사건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수십 년 간 크고 작은 봉기가 이어졌고, 대만 통치는 결코 안정되지 않았다.
청조는 점차 군사적 주둔을 강화하고, 본토 관료의 순환 주기를 늘려가며 통제력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대만의 복잡한 사회 구조는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원주민 사회는 여전히 산지에서 독자적 질서를 유지했고, 한족 사회 내부의 갈등은 구조적으로 남아 있었다.
중앙 정부의 명령은 섬 곳곳에서 왜곡되었고, 현지 권력자들은 때로 중앙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편, 외부 세계는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서구 열강은 다시금 아시아 바다로 눈을 돌리고 있었고, 청조 내부는 서서히 균열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만은 또 한 번 거대한 변화의 파도 앞에 놓이게 된다.
이번에는 더 강렬하고, 더 복합적인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섬은 여전히 자기만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 시간은 점점 더 세계사의 시계와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6장. 일본 식민지 시대 — 근대화의 그림자
1895년 봄, 섬은 또다시 새로운 깃발을 맞았다.
청일전쟁의 패배, 시모노세키 조약.
그 한 줄의 조약문 안에서, 대만은 제국의 교환품으로 넘겨졌다.
“대만, 팽호 열도는 영구히 일본 제국에 할양한다.”
외부의 언어로 섬의 운명이 다시 결정된 순간이었다.
섬 주민들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총구와 군함이 그 뜻을 대신했다.
대만은 이제 일본 제국주의의 실험장이 되었다.
새 통치자들은 곧장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섬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근대화는 언제나 식민 지배의 논리 안에서만 허용된 것이었다.
섬 내부에서는 격렬한 저항이 일어났다.
공식적인 통치 개시일인 1895년 5월 29일, 타이베이 성에서 저항군이 결사항전을 벌였다.
이어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일본군은 이를 철저히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이 학살당했고, 농촌과 마을은 불탔다.
저항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1907년 북부 타오위안에서의 원주민 봉기,
1915년 서부 장화 지역의 대규모 반일 무장 투쟁(타이중 사건) —
그러나 일본군의 군사력은 압도적이었다.
섬 전체는 철저히 군정 아래 놓였다.
그렇다고 식민 통치가 오직 억압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근대화는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포장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철도가 놓였다.
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철도망은 일본 본토와의 교역을 위해 설계되었다.
도로와 항만이 정비되었고, 전근대적 농업은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되었다.
사탕수수, 쌀, 차 — 일본 시장을 위한 생산체계가 구축되었다.
교육도 변화의 한 축이었다.
일본 정부는 학교를 세우고, 일본어 교육을 강제했다.
전통 한문 교육은 점차 축소되었고, 원주민 언어는 공적 공간에서 사라져갔다.
문화적 일본화도 강하게 추진되었다.
일본식 신사(神社)가 곳곳에 세워지고, 황민화 교육이 진행되었다.
식민지 청년들에게는 “황국 신민”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주입되었다.
그러나 내면 깊은 곳에서 대만이라는 이름의 정체성은 살아남았다.
학교 교실 밖에서, 가정 안에서, 농촌의 축제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언어와 기억을 지켰다.
한편, 식민지 경제 구조는 섬 내부의 계층적 변화를 가져왔다.
일부 한족 지주층과 상인들은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새로운 부를 쌓았다.
그러나 대다수 농민과 노동자는 여전히 가혹한 착취에 시달렸다.
원주민 사회는 더욱 큰 고통을 겪었다.
일본 당국은 원주민 지역을 “치안 부재 지대”로 규정하고 군사적 통제를 강화했다.
수많은 원주민 마을이 파괴되었고,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다.
1930년, 무사 무장 봉기(霧社事件)는 그 절정이었다.
세이디크 족의 지도자 모나 루다가 이끈 저항은 짧았지만,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일본군은 봉기 진압 후 원주민 사회를 철저히 재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식민 통치기 동안 현대적 시민 사회의 토대도 만들어졌다.
신문, 잡지, 문학 활동이 활발해졌고,
사회운동과 민족운동도 성장했다.
타이완 민중당, 타이완 문화협회 같은 조직이 등장해 민권과 자치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당국은 결코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치 요구는 번번이 거부되었고, 민족 운동가는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대만 사회는 더욱 전시 동원 체제로 편입되었다.
징병과 징용이 이루어졌고, 전쟁 말기에는 대만 청년들이 일본군으로 참전하기도 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식민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 유산은 깊게 남았다.
근대적 인프라와 교육 시스템은 일본 식민 통치의 유산이었고,
그 과정에서 누적된 사회적 불평등과 정체성의 혼란 역시 일본 시대의 그림자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만은 누구의 땅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이 시기를 거치며 더욱 날카로워졌다는 점이다.
제국의 이름으로 근대화를 경험한 대만인들은 이제 더는 단순한 피지배 민중이 아니었다.
정체성을 고민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주체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다음 맞이할 시대는 또 다른 충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식민지의 그림자가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외부 권력이 섬을 덮쳐오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