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브리튼 섬의 시작 – 로마 이전의 시간들
우리는 종종 역사를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브리튼의 역사는 이름도, 국경도, 지도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그 시기의 사람들은 자신이 '영국인'이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단지 살아 있었다. 추위 속에서 사냥을 했고, 돌을 쌓아 신을 만들었으며, 별을 보며 방향을 잡았다. 이들을 오늘날 우리는 '브리튼의 선사인류'라고 부르지만, 그들에게는 스스로를 그렇게 부를 언어조차 없었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이주한 뒤, 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에 정착한 것은 약 40,00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브리튼은 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고, 인간은 땅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기후가 따뜻해지며 빙하가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브리튼은 섬이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고립은 이 섬의 숙명이 되었다. 고립은 방어의 장점이자 발전의 장애물이었고, 그 이중성은 앞으로 수천 년간 반복되는 테마로 작용한다.
이 땅의 초기 거주민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야만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연을 읽는 데 있어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감각을 지녔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방식도, 생존을 기리는 방식도 우리보다 더 시적이었다. 대표적인 유산이 스톤헨지다. 거대한 석재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옮겨와, 정교한 천문학적 배열로 세운 이 구조물은 '과학'이 문명과 동시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기술은 종이와 숫자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늘과 바람, 돌의 결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했다.
브리튼의 원주민은 켈트족이었다. 그러나 '켈트'라는 정체성조차 로마인들의 언어로 규정된 말이다. 실제로 그들은 다양한 부족과 방언으로 구성된 느슨한 문화 집단이었으며, 공통된 법이나 통치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동체 중심의 삶을 살았고, 전사는 영혼과 자연을 중시하는 사제 집단(드루이드)의 축복 속에 싸웠다. 전쟁은 생존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영혼을 증명하는 의식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침략자들에게 이들의 문화는 단지 정복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기원전 55년, 브리튼은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잃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군단이 상륙하면서다. 당시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넘어 북유럽까지 확장하려 했고, 브리튼은 그 여정의 끝자락에 위치한 정복지였다. 카이사르는 두 차례 원정에 나섰으나, 본격적인 정복은 그로부터 100년 뒤,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기에 이루어진다.
로마가 가져온 것은 단지 무력만이 아니었다. 도로, 수도 시스템, 벽돌 건물, 그리고 라틴어. 브리튼은 갑자기 도시가 되었고, 세금이 생겼으며, 황제의 초상화가 새겨진 동전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국가'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자연과 공동체 중심의 삶은 개인과 행정 중심의 질서로 바뀌었고, 드루이드는 이교도로 탄압받았다. '문명화'는 선택이 아닌 강요였고, 그 혜택은 소수의 로마화된 엘리트에게만 돌아갔다.
로마의 통치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본토 방어에 집중하면서 브리튼에서의 병력과 관리가 철수하자 이 섬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정복자는 떠났지만, 그들이 남긴 구조는 무너졌고, 이전의 질서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국가란 개념은 사라졌고, 유산은 정체성 없는 돌무더기로 남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브리튼은 진짜 '영국'이 되기 위한 씨앗을 키우기 시작한다. 정체성의 공백 속에서 새로운 언어, 새로운 종교, 새로운 권력의 틀이 싹트기 시작하는 것이다.
역사는 늘 그런 방식으로 움직인다. 힘의 중심이 사라질 때, 그 자리는 혼란으로 채워지고, 그 혼란은 결국 다음 시대를 부른다. 브리튼 역시 그 운명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이 섬의 사람들은 아직 모른다. 자신들이 ‘영국’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될 운명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제2장. 색슨족과 앵글로인의 등장 – 침입자에서 건국자로
로마가 떠난 자리엔 황량한 진공이 남았다. 제국은 국가를 만들었지만, 그 뿌리를 내릴 만큼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도로는 폐허가 되었고, 도시에는 군단 대신 도적과 이민족이 들끓었다. 브리튼은 또다시 ‘무주공산’이 되었다. 역사는 종종 이 공백의 시간을 무질서로 취급하지만, 실은 이 시기가야말로 새로운 질서가 싹트는 시기였다.
그 틈을 파고든 존재가 바로 게르만족, 그중에서도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이었다. 이들은 오늘날의 덴마크, 북독일 해안에서 온 바다의 사람들이다. 원래는 용병으로 초대된 자들이었다. 브리튼의 토착 지배자들은 피난민처럼 몰려드는 켈트 부족과 스코틀랜드의 픽트족, 아일랜드의 게일족을 막기 위해 이방인의 창을 빌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외부의 칼은 안쪽을 향하기 마련이었다.
색슨족은 ‘침입자’가 아니라 곧 정착민이 되었다. 그들은 로마인이 놓고 간 폐허 위에 자신들의 마을을 지었고, 자신들의 언어로 세상을 다시 부르기 시작했다. ‘브리튼’은 점차 ‘앵글란드’(Angle-land), 즉 잉글랜드로 재명명되었다. 언어는 정체성을 만든다. 그리고 이름을 지은 자는 그 땅의 주인이 된다. 이것이 역사에서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한 정복 방식이다.
앵글로색슨 시대는 중앙 권력이 사라진 시대였다. 국왕은 있었지만,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연맹의 상징에 가까웠다. 잉글랜드는 수많은 작은 왕국들 – 머시아, 노섬브리아, 웨식스, 켄트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이들은 끊임없이 전쟁과 혼인을 반복하며 상대의 영토와 정당성을 탐했다. 하지만 이 혼란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공통 문화’를 만드는 거름이 되었다.
색슨족은 로마인의 석조 문화 대신 목재의 문화를 선호했고, 도시는 다시 마을로 퇴보했다. 그러나 그 대신 탄탄한 공동체 의식과, 말과 계약의 문화가 자리 잡았다. 귀족과 농민의 관계는 단순한 수탈이 아니라 상호 의무로 구성된 피의 공동체였고, 이것은 후일 '봉건제'의 핵심 구조로 발전한다. 문명은 결코 일직선이 아니다. 한 시대의 후퇴는 다음 시대의 기초가 된다.
이 시기의 결정적 전환점은 기독교의 재전래였다. 원래 로마 제국 하에 기독교는 브리튼에 들어왔지만, 로마의 쇠퇴와 함께 사라졌거나 주변화되었다. 그런데 597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어거스틴 수사를 켄트 지역에 파견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어거스틴은 단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라틴 문명과 교회 조직, 기록 문화를 되살렸다. 종교는 단지 영혼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문명적 질서를 복원하는 도구였다.
교회는 글자를 가르쳤고, 땅을 나눴으며, 왕에게 신의 권위를 부여했다. 즉, 문자와 신앙을 독점한 자들이 곧 새로운 엘리트 계층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은 칼이 아닌 종이와 사제복으로 완성된 정복이었다. 앵글로색슨 왕들은 점차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회를 지어 스스로를 ‘신의 대리자’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왕권신수설의 초기 형태가 잉글랜드에 나타난다.
하지만 이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앵글로색슨 왕국이 점차 통합되어가던 8세기 말, 또 다른 바다의 사람들이 이 섬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르드의 전사들이자 상인, 농부였으며, 오늘날 ‘바이킹’으로 기억되는 존재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 이후의 브리튼에 질서를 심은 앵글로색슨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겪었던 침입을 똑같이 당하게 될 운명이었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리듬은 반복된다.
브리튼은 또다시 스스로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자신보다 더 거친 이방인들과 싸워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
그 전쟁은 단지 땅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잉글랜드’라는 이름을 영혼으로 지켜내기 위한 의식이었다.
제3장. 바이킹의 습격과 덴마크인의 지배 – 문화인가 침략인가
바다는 늘 침묵을 가장한 칼이었다. 잉글랜드의 해안에 일어난 변화들은 대부분 갑작스러운 소리 없는 파도와 함께 시작됐다. 8세기 말, 린디스판 수도원에 첫 도끼가 날아들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다는 사실을 몰랐다. 수도사의 피가 번진 그 새벽은 단지 약탈의 시작이 아니라, 잉글랜드 정체성의 시험대였다. 바이킹이 왔다.
바이킹은 우리가 아는 ‘해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농업과 항해, 철기와 무역, 심지어 시(詩)와 신화를 가진 민족이었다. 다만, 그들의 문명은 로마의 전통을 물려받은 라틴 문화와는 전혀 다른 코드 위에 있었다. 바이킹은 글자를 가졌지만 문서를 남기지 않았고, 법을 가졌지만 그것을 기록보다는 기억으로 전했다. 그들의 세계는 말과 검이 동시에 권위였던 시공간이었다.
처음 잉글랜드를 습격한 바이킹은 단지 황금과 노예를 원했다. 그러나 곧 이 땅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잉글랜드는 약탈 대상이 아니라 정착 가능한 기회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점차 북부와 동부 잉글랜드에 '데인로(Danelaw)'라 불리는 덴마크식 자치구역을 세우고, 자신들만의 법과 통치를 시행하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침략자였을까, 아니면 이민자였을까?
바이킹은 교회를 불태우고 사제를 죽였지만, 동시에 그 지역 농민과 혼인했고, 아이를 낳았으며, 시장을 만들었다. 이들이 세운 데인로는 오늘날의 요크(York)를 중심으로 번성했고, 노르드어와 영어가 섞인 새로운 언어 생태계가 생겨났다. 단어 몇 개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를 들어, 'sky', 'egg', 'window' 같은 일상어조차 이 시기의 잔재다.
잉글랜드의 토착 왕국들은 이 바이킹 세력에 대응할 필요가 생겼고, 그 결과 역설적이게도 하나의 통합된 왕권에 대한 열망이 자라났다.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은 그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단순한 무장이 아닌 교육자이자 행정가, 민족의 건축자였다. 그는 방어를 위해 요새를 세우고, 이동식 부대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라틴어 고전을 앵글로색슨어로 번역하는 문화 운동을 이끌었다.
그가 남긴 가장 강력한 유산은 물리적 성이 아니라 기억의 성이었다. 그는 국민이란 개념을 처음으로 ‘문자와 언어’를 통해 묶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검으로만 묶인 왕국’이 아닌 ‘말로써 연결된 민족’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프레드의 승리는 잠정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덴마크계 왕들이 다시 잉글랜드를 지배하게 된다. 1016년 크누트 대왕(Cnut the Great)은 잉글랜드를 덴마크 제국에 통합시켰고, 이는 노르만 왕조 이전 잉글랜드 통치 구조의 결정판이 되었다. 그는 무력 정복자였지만, 동시에 기독교를 수용한 통합자였다. 흥미롭게도 그는 신하들 앞에서 바닷가에 앉아 파도에 명령을 내리는 연극을 했다. 그것은 권력의 유한함을 스스로 인정한 왕의 자조적 행위였다. 바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 시기를 단순히 바이킹의 시대라고 규정하면, 우리는 중요한 걸 놓친다. 그것은 바로 문화적 융합의 실험실이었다는 점이다. 정복과 동화, 피와 결혼, 언어와 신화가 엉켜 하나의 ‘잉글랜드’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정복은, 칼이 아닌 문화로 이뤄진다.
바이킹은 잉글랜드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그 DNA 안에 자신들을 영원히 새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