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고려 말의 풍경은 끝이 가까웠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노인의 얼굴과도 같았다.
산과 강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속 질서는 이미 무너져 있었고, 나라의 기둥이었던 토지는 이미 몇몇 자의 손에 집중돼 있었다.
농민은 밭에서 밀려났고, 관리는 절에 뇌물을 바치고, 사찰은 땅을 늘렸다.
그것은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사유재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성계는 그 틈을 정확히 읽었다.
명나라의 부름을 받은 출정길에서, 그는 칼을 거두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그는 '충신'에서 '역적'이 되었고, 곧 ‘새로운 왕조의 개창자’가 되었다.
1392년, 고려가 내려앉고 조선이 세워졌다.
조선은 ‘이성계의 나라’로 기억되지만, 초반의 설계자는 정도전이었다.
그는 고려의 귀족 정치를 끝내고, 새로 태어나는 나라에 ‘신권 중심의 유교 국가’를 꿈꾸었다.
고려가 왕실과 불교의 나라였다면, 조선은 문신과 유교의 나라였다.
정도전은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고,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그는 법전을 만들고, 종묘와 사직의 틀을 새로 세웠으며, 무엇보다 왕이 절대 권력을 갖지 못하도록 신하의 권한을 분산시켰다.
그는 이 나라의 미래를, 한 사람의 힘이 아니라 제도로 지탱하고자 했다.
그러나 권력은 단순한 이념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아들들의 세력 다툼이 시작됐고,
정도전은 그 정쟁의 한복판에서 칼을 맞았다.
그를 제거한 인물은 이방원, 훗날의 태종이다.
그는 아버지의 왕권을 대신 이어받기 위해, 형제들을 제거하고 피의 쿠데타를 일으켰다.
조선의 초창기는, 유교 이상국가의 실험실이 아니라, 권력과 혈육이 얽힌 피비린내 나는 무대였다.
태종은 조선을 다시 ‘왕의 나라’로 되돌려놓았다.
그는 6조 직계제를 시행하여 신하의 권력을 줄이고, 국왕 중심 행정을 강화했다.
사병을 혁파하고 호패제를 도입하며, 전국을 다시 국가의 질서 속에 넣었다.
또한 토지 대장을 정비하고 인구를 재조사하여, 세금 기반을 튼튼히 다졌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정보의 독점을 통해 통치하는 왕이었다.
밀지를 내리고, 사헌부와 사간원을 감시하며, 모든 비판을 억제했다.
그에게 조선은 왕의 뜻 아래 정확히 작동하는 행정기계여야 했다.
태종은 조선의 몸체를 세웠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세종은 그 몸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세종은 1418년 즉위했다.
그는 아버지 태종의 강압과 형제들의 경계 속에서 성장했다.
문약하다는 평을 들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사려 깊었고, 끈질겼다.
즉위 후, 그는 정치권력보다는 지식과 제도의 힘으로 나라를 움직이려 했다.
집현전을 강화하고 유능한 학자들을 불러들여 학문과 과학, 농업과 의학, 군사까지 방대한 분야를 정비했다.
그가 만든 훈민정음은 단순한 문자체계가 아니라, 말할 수 없던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는 세계’를 열어준 도구였다.
세종은 또한 실용적이었다.
측우기와 해시계, 앙부일구, 자격루, 농서 편찬과 향약 정비 등은 모두 현실에서 백성들이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들이었다.
그는 인간을 통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이해하고 교육하고 이롭게 해야 할 존재로 여겼다.
하지만 그 또한 병약했고, 가족 문제로 마음고생이 깊었다.
자식들과의 관계는 항상 불안정했고, 장남인 문종은 병약했으며, 차남인 수양대군은 지나치게 야심이 컸다.
세종은 아버지의 힘으로 나라를 물려받았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왕이 되기 위해 피를 묻혀야 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였다.
그가 꿈꿨던 이상은, 문(文)의 힘이 칼보다 오래가리라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시대는 다시 피와 권모의 세계로 되돌아간다.
세종이 죽고 난 후, 조선은 잠시 어두운 방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 방 안에는 그림자가 먼저 움직였다.
문종은 학식이 깊고 온화한 인물이었지만, 너무 일찍 병들었고 너무 오래 기다렸다.
세종은 그에게 모든 것을 넘기려 했지만, 그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다.
문종은 겨우 2년 남짓 왕위에 있었고, 조선의 가장 불안정한 시기에 나라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문종의 아들, 단종은 열두 살이었다.
어린 왕의 눈에는 왕좌가 크고 낯설었고, 조정은 그 틈을 노려 움직였다.
한때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이었던 수양대군은 칼을 거머쥐었다.
그는 잠시 기다리지 않았다.
1453년, 계유정난.
수양대군은 단종의 외척이자 문신 정치를 이끌던 김종서를 제거했고,
1455년에는 결국 조카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단종은 유배됐고, 이듬해 스스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아니, 누군가는 말한다. 목을 맨 게 아니라 ‘목이 맺혔다’고.
살고자 했지만 살 수 없었던 그 나이 어린 왕은 결국 기록의 가장 짧은 줄 속에 남았다.
새로운 왕, 세조.
그는 유교적 명분보다는 실질적 권력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불교적 신앙심이 강했고,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즉 목숨을 잃은 자와 버티다 살아남은 자들 모두는
그 시절의 피비린내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조는 뛰어난 행정가이기도 했다.
병제 개혁, 군사 조직 정비, 직전법 시행 등, 나라의 체제를 강하게 다듬었다.
그에게 조선은 더 이상 이상국가의 실험장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이는 행정 조직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 피 위에 세운 질서는 오래가지 않았다.
왕위는 그의 아들 예종을 거쳐, 다시 또 다른 계승자 성종에게로 넘어간다.
성종, 균형의 정치를 시도하다
성종은 조선 초기의 ‘정치적 조율’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는 세조처럼 칼을 휘두르지 않았고, 세종처럼 학문에 몰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훈구와 사림 사이, 유교적 도덕과 현실 정치 사이, 왕권과 신권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줄을 탔다.
훈구는 세조 시절부터 권력을 장악했던 실무 중심의 공신 세력들이었고,
사림은 지방에서 글을 읽고, 공맹을 논하며 올라온 젊은 선비들이었다.
성종은 사림을 3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 등용하여 언론 기능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훈구파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의 정비를 명했고,
경국대전이라는 완성된 법전을 반포하여 조선의 정치제도를 확립시켰다.
외척세력의 정계 진입을 경계하고, 국왕 스스로 중심을 잡아 나라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다룬 것은 단순히 제도만이 아니었다.
궁중의 사랑과 권력, 질투와 암투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의 후궁 중 한 사람인 윤씨는 중종의 생모였고,
훗날 성종의 또 다른 부인 정현왕후와의 세력 다툼 속에서 독을 먹고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조선의 정치사는 늘 법과 제도의 틀 아래 감춰진,
핏빛 궁중의 드라마가 함께 흐르고 있었다.
사림의 등장과 조선의 또 다른 긴장
성종이 등용한 사림들은 단순히 젊은 인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훈구 세력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훈구가 실리를 추구하며 권력의 중심에 가까워지려 했다면,
사림은 도덕과 절의를 앞세워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쪽이었다.
이런 흐름 속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조광조다.
중종 때 나타난 이 젊은 유학자는 불같은 개혁가였다.
그는 향약을 정비하고, 현량과로 신진 사림을 등용하며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훈구파의 반발은 거셌다.
그의 개혁은 너무 빨랐고, 너무 도덕적이었고,
무엇보다 현실 정치를 이해하지 못한 순수함이 있었다.
결국 그는 기묘사화로 유배되고, 독배를 들었다.
그를 따르던 사림들은 그 후에도 오랜 시간 조정의 주변에서
소외되고, 감시받고, 때로는 사화에 휘말려 희생됐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책을 읽었고, 지방 향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사대부 가문에서 집안을 세우며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들은 다시 조선의 정치를 장악하게 된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늘 두 갈래의 길 위를 걸었다.
하나는 왕이 걷는 길이고, 하나는 신하들이 걷는 길이다.
그리고 그 둘의 발자국이 다를 때마다, 조정은 뒤틀렸고 백성은 피곤해졌다.
성종의 뒤를 이은 왕은 연산군이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별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그는 시를 좋아했고, 예술에 감수성이 있었으며,
문신들의 학문을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조선의 시작들이 그랬듯이, 문제는 사람보다 기억에 있었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폐비 윤씨였다.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녀는 어느 날, 궁녀를 폭행했다는 이유로 폐출됐고
곧 독살당했다.
연산군은 어머니의 죽음을 어릴 적부터 숨겨진 채 자랐다.
누구도 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진실을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 순간, 그는 무너졌다.
그는 복수를 시작했고, 궁궐은 복수의 제단이 되었다.
신하들을 색출했고, 언관을 죽였고, 살아남은 자는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림을 숙청하고, 언론을 폐지했으며,
술과 여색에 탐닉하면서 궁궐을 연회장으로 바꿔버렸다.
궁녀 수천 명을 뽑아 들이고, 시와 노래, 가무에 빠졌다.
그러나 그의 광기는 문화가 아니었고, 예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억눌린 기억이 터져나온, 권력의 반동이었다.
마침내 신하들은 그를 버렸다.
1506년, 중종반정.
연산군은 폐위되었고, 강화도로 유배되어 쓸쓸히 죽었다.
그는 조선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받지 못한 유일한 인물로 기록된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 뒤에 ‘군’만을 남겼다.
중종, 개혁을 걸고 권력에 맞서다
중종은 반정을 통해 왕이 되었다.
하지만 반정은 늘 두 개의 얼굴을 가진다.
하나는 정의를 세우겠다는 명분이고, 하나는 권력을 다시 나누겠다는 속뜻이다.
중종은 새 왕이었지만, 자신을 왕으로 만든 세력에게 빚을 진 군주였다.
그는 왕이었지만 자유롭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외부로부터 ‘새로운 바람’을 들여오기로 한다.
그 이름이 바로 조광조였다.
조광조와 사림, 이상은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었는가
조광조는 사림 중에서도 가장 열정적인 개혁가였다.
그는 도덕을 통치의 근본으로 삼았고, 공자의 정치를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말이 아닌 ‘실천’을 요구했고, 그 실천은 왕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는 현량과를 설치하여 인재를 시험이 아닌 인품으로 뽑게 했고,
향약을 각 지역에 도입하여 백성이 서로를 감시하고 교화하도록 했다.
또한 부패한 훈구 대신들을 몰아내고, 유학적 이상을 기준으로 국가를 새로 짜려 했다.
하지만 그가 건드린 것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권력을 지키려는 자들의 생존 본능이었다.
훈구파는 반격했다.
그는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에 엮여 역모 혐의를 썼고,
이내 유배되고, 기묘사화로 목숨을 잃는다.
그가 만든 향약은 사라졌고, 현량과는 폐지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흩어져 다시 은둔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림은 뿌리를 내렸다.
그들은 패배했지만, 완전히 지지 않았다.
산속으로, 서원으로, 향교로 들어가
다시 책을 읽고, 가문을 세우고, 인재를 길렀다.
사림은 권력은 잃었지만 명분을 지켰고,
명분은 훗날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내는 씨앗이 되었다.
사림의 시대, 그 시작 앞에서
중종은 조광조를 잃은 뒤로도 한동안 조심스레 정치를 이끌었다.
표면상으로는 안정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늘 긴장이 흐르는 나날이었다.
이 시기부터 사림은 본격적으로 조선 정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훈구의 현실주의와 사림의 도덕주의는 종종 겉으론 타협했지만,
속으론 결코 화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두 세력의 긴장이, 조선의 후반부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된다.
분당과 붕당, 사화와 정쟁, 당쟁과 피의 순환.
모두가 이 균열에서 비롯된다.
조선이 건국될 때 그린 나라는 유교적 이상과 법치 위에 세워진, 사람이 사람을 다스리는 나라였다.
그러나 이상은 늘 현실 앞에서 뒷걸음질친다.
그 현실은 사림의 등장과 분열, 그리고 권력의 외곽으로부터 밀려드는 사적 욕망이었다.
명종 시대, 사림은 피를 흘리며 살아남는다
중종의 뒤를 이은 왕은 명종이었다.
하지만 명종이 왕위에 오를 때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어린 왕이 조정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는 섭정을 맡으며 조정을 불교의 부활 실험실로 만들었다.
불교는 조선 초기부터 배척당해왔지만, 문정왕후는 자신의 정권 기반을 위해 승려 보우를 불러 법회를 열고,
궁궐 안에 불사를 행하며, 유교적 조정에 균열을 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사상이나 종교가 아니라 외척의 권력 팽창이었다.
문정왕후는 자신의 오빠인 윤원형을 조정에 세우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와 반대파였던 윤임, 심연원 등은 차례차례 제거되었고,
1555년, 결국 또 하나의 사화가 터진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사림끼리 서로를 베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기존의 사화들이 훈구와 사림의 충돌이었다면, 이제는 사림이 스스로를 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림이 유배되거나 죽었고,
그 피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말 없는 조정과 공허한 도덕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림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명종이 1567년 세상을 떠나고, 문정왕후가 눈을 감자,
사림은 다시 한 번 역사의 전면으로 복귀하게 된다.
선조의 즉위와 사림의 본격적 분당
명종의 후계자가 없자, 왕실은 먼 종친이던 열여섯 살 이균(선조)을 불러들였다.
그는 조용하고 말이 적은 인물이었다.
그의 즉위는 단순한 왕의 교체가 아니라, 사림 정권의 시작을 뜻했다.
사림은 이제 조정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기다려왔고, 그만큼 서로 다른 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1575년, 관직 인사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결국 사림을 둘로 갈랐다.
동인과 서인.
동인은 김효원 계열로,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학문 성향을 가졌으며,
서인은 심의겸 계열로, 신중하고 점진적인 실천을 중시했다.
이 분당은 단순한 학문 논쟁이 아니라,
사람을 나누고, 가문을 나누고, 향촌과 조정을 동시에 갈라놓는 정치적 균열이었다.
동인은 영남, 서인은 기호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고,
시간이 갈수록 그 대립은 격화됐다.
이제부터 조선은 정책보다 사람, 국정보다 편당, 진실보다 당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붕당정치의 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붕당의 시작, 그리고 불안한 조선의 기류
선조는 그 붕당 사이를 줄타기하며 정치를 이어갔다.
그는 어느 쪽에도 확실히 기대지 못했고, 결국 어느 쪽의 신뢰도 얻지 못했다.
조정은 사림으로 가득했지만, 서로를 향한 견제와 질투, 배척으로 가득 찼고,
그 틈에 정치는 점점 마비되어 갔다.
그러던 중, 조선은 전혀 다른 곳에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통일한 뒤, 조선을 침공할 야욕을 드러냈다.
하지만 조선은 그것을 ‘빈 말’로 여겼다.
사신을 보냈고, 돌아온 보고서에는 일본이 준비 중이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지만,
선조는 믿지 않았다.
아니, 믿지 않았다기보다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
조선의 방어선은 하루아침에 무너졌고,
한양은 불탔고, 왕은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1592년, 임진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끄는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했다.
그들은 섬에서 칼을 갈아온 자들이었다.
화약과 조총을 앞세운 전술은 조선의 구태의연한 진형을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선조는 전란이 일어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한양을 떠났다.
그는 조정을 의주로 옮기고, 명나라에 급하게 구원을 요청했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난 것을 조선 백성들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한양이 점령당했을 때, 사대부들은 이미 숨었고,
군사는 흩어졌으며, 관리는 성문을 열었다.
조선의 나라라는 기틀은, 그토록 허약했다.
그 속에서 끝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조직’이 아니라 사람들이었다.
바다는 버티고 있었다 — 이순신
임진왜란의 전황 속에서 단 한 줄의 희망이 있었다면,
그건 육지가 아니라 바다였다.
그리고 그 바다를 지킨 사람, 이순신이 있었다.
그는 명나라 사신에게조차 "조선에 진짜 영웅이 있다면 그가 바로 이순신"이라 불릴 만큼,
전쟁 전체의 균형을 단 한 사람이 바꾸고 있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구조부터 바꾸었다.
그는 학익진으로 왜군을 포위했고,
거북선이라는 새로운 함선을 운용하며 조총보다 먼저 불을 뿜었다.
옥포, 한산도, 명량...
수많은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는 싸움을 기술이 아닌 의지와 질서로 여겼고,
장수를 부리기보다는, 사람을 이끌었다.
그러나 조정은 그를 질시했고, 일부는 두려워했으며,
결국 그는 모함을 받아 투옥된다.
그가 없는 사이 조선 수군은 궤멸됐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무리하게 출전해 칠천량에서 대패했고,
수군은 다시 무너졌다.
그제야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가 돌아와서 싸운 마지막 전투가 바로 명량 해전이었다.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군을 맞아 싸웠고,
그 바다를 지켜냈다.
이순신은 전쟁의 끝자락,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죽음을 숨기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싸움이 끝날 때까지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는 그렇게 죽었다.
왕보다 위대한 무장이었고, 백성의 이름으로 싸운 장수였다.
백성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다 — 의병
수군은 바다를 지켰고,
육지에서는 의병이 움직였다.
그들은 훈련된 군사가 아니었다.
농민, 유생, 천민, 노비, 승려까지.
칼을 처음 쥔 손, 말을 모는 법도 모르는 발.
그러나 그들의 눈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지켜야 할 집이 있었다.
곽재우, 고경명, 조헌, 정문부, 서산대사...
이름이 남은 자도 있고,
이름 없이 죽은 자도 많았다.
그들은 관에서 명령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전장에 나섰다.
조선의 군대가 무너졌을 때,
나라를 지킨 건 백성이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조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은 철수했다.
7년간의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사람도 땅도 제도도 무너져 있었다.
전국의 고을이 불탔고, 세금체계가 붕괴됐으며,
왕실은 위신을 잃었고, 사림은 분열되었다.
수십만 명이 죽거나 납치되었고,
문화재와 기술자들은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 폐허 위에, 조선은 다시 ‘회복’이라는 이름의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광해군, 실용을 택한 왕
임진왜란 중에 선조의 후계자로 낙점된 인물은 바로 광해군이었다.
그는 전란 속에서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고,
조정과 민심 사이를 중재하며 실무형 리더로 부상했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이전의 군주들과는 달랐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유교 이념보다는 현실적 통치를 중시했다.
그는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민생 안정을 위한 대동법 시행을 시도했으며,
전쟁으로 무너진 백성의 생계와 호적, 토지 제도를 재정비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의 외교 정책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끼어 있었다.
광해군은 명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면서도,
새롭게 부상한 후금(청나라)과의 관계를 절묘하게 조율했다.
그는 전면전을 피하고, 국력을 비축하려 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탁월한 실리외교였지만,
조선의 조정, 특히 사대주의에 경도된 서인 세력은 이를 ‘배신’으로 간주했다.
그에겐 또 하나의 약점이 있었으니,
어머니가 중전이 아니었고,
세자도 중전 소생이 아니었다.
궁궐 안의 피로 맺은 권력은, 항상 이런 작은 틈을 타고 흘러나왔다.
결국 서인과 일부 남인의 합작으로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며,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후일 제주도로 쫓겨나 그곳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그는 조선의 유일한 실리 외교가 왕이었고,
죽어서야 조금씩 재평가 받는 군주가 되었다.
광해군이 쫓겨난 뒤, 조선은 ‘의리’라는 단어를 국시(國是)처럼 들고 나왔다.
왕이 명나라를 배신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반정을 일으켰고, 그 반정의 수혜자는 바로 인조였다.
그러나 인조는 처음부터 명분만 있고 능력은 없는 왕이었다.
그의 치세는 시작부터 서인의 권력 독점, 외척의 개입, 그리고 민생의 피로감 속에서 출발했다.
백성은 전쟁의 폐허에서 겨우 일어났는데, 조정은 오히려 명에 대한 충절을 되새기며 지나간 황제를 위해 살아가라 강요했다.
명나라는 쇠락하고 있었고, 북방의 후금은 빠르게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명과의 ‘의리’를 강조하며 현실 외교를 거부했다.
광해군 시절 후금과 조율했던 관계는 깡그리 무시되었고, 후금은 점점 불편한 침묵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정묘호란 — 한 번은 막을 수 있었던 전쟁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공했다.
이것이 바로 정묘호란이다.
당시 후금은 이미 명과 본격적인 충돌을 준비하며 조선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었다.
조선이 명의 정벌군을 돕고 있다는 정보가 퍼지자, 후금은 신속하게 군대를 보냈다.
조선은 전열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평양이 함락되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했다.
다행히 전면전까지 이어지진 않았고, 후금은 형제국의 맹약을 조건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이 ‘강화조약’을 받아들인 뒤에도 후금을 ‘오랑캐’라 부르며 내부적으로는 복수와 명분을 다졌다.
그게 바로 두 번째 전쟁을 부른 씨앗이었다.
병자호란 — 눈으로 얼어붙고, 무릎으로 꺾이다
1636년 겨울, 후금은 이제 이름을 바꿔 청나라가 되었고,
조선에 정식 조공을 요구했다.
이는 단순한 외교 관계 수립이 아니라, 조선으로 하여금 명과의 결별을 선언하라는 것이었다.
인조는 그 요구를 거부했다.
왕이었지만, 현실을 보지 않았고, 신하들의 강경론에 끌려 다녔다.
조정은 감정으로 결정을 내렸고, 결국 청은 조선을 다시 공격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 발발.
청군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순식간에 한양 인근까지 들이닥쳤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45일간의 고립과 굶주림이 시작됐다.
산성 안의 군사 수는 턱없이 부족했고, 보급은 끊겼으며,
백성들은 눈 덮인 언덕 아래서 굶어 죽고 있었다.
밖에서는 청의 대군이 성을 포위하고, 항복을 종용했다.
조정은 분열됐고, 신하들은 서로를 의심했다.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심한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일대)로 끌려갔고,
청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그것은 조선 왕조가 경험한 가장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신하들은 울었고, 백성은 고개를 돌렸으며,
기록은 그 장면을 남겼지만, 모두가 지우고 싶어 했다.
끌려간 사람들과 돌아오지 못한 이야기들
조선은 항복의 대가로 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청에 바쳐야 했다.
수많은 백성들과 기술자, 문인, 장인들이 끌려갔고,
그들 중 다수는 돌아오지 못했다.
혹은 돌아와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삼전도 비에는 인조의 항복을 기념한 문장이 새겨졌고,
그 비석은 조선의 왕이 청에 충성을 맹세한 증거가 되었다.
나중에 정조는 그 비석에 '비(碑)' 자를 거꾸로 새기게 했다.
그러나 그 어떤 돌도 굴욕을 덮어주진 못했다.
조선은 왜 이렇게까지 무너졌는가
병자호란은 단지 전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 스스로 쌓아온 명분의 성벽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보여준 사태였다.
왕은 현실을 외면했고, 신하는 충을 명분으로 삼아 국민을 굶겼고,
백성은 나라를 지켰지만, 나라가 백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 시기를 지나며 조선은 외교적으로는 침묵하고, 내부적으로는 불신과 체념을 키우게 된다.
이제 조선의 과제는 단지 외적의 위협이 아니라,
무너진 정치의 복원과 민심의 회복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났지만, 조선은 끝나지 않은 전쟁을 마음속에 품었다.
무릎은 꿇었지만, 말로는 꿇지 않았고,
항복은 했지만, 얼굴은 숙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라가 택한 것은 ‘복수’였다.
그러나 그 복수는 철저히 명분의 복수였다.
실제의 검보다, 말의 칼을 더 많이 갈던 시대.
조선은 그런 식으로 ‘굴욕을 복기하며 살아가는 나라’가 되어갔다.
효종, 북벌을 준비하던 왕
인조의 아들 효종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왕자였다.
심양에서의 그 굴욕과 분노는 그의 젊은 날을 뒤덮었고,
왕이 되자 그는 칼을 빼지 않고도 북을 향해 가슴을 열어두었다.
그가 내세운 국정 기조는 명확했다. 북벌.
청을 치기 위한 군비 증강, 무기 개량, 군영 재편, 기술자 양성...
겉으로 보자면 조선이 다시 군사국가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조선은 이미 전쟁으로 황폐했고,
농민은 세금과 군역에 지쳐 있었으며,
조정은 북벌에 대한 준비보다는 그 명분을 반복해서 말하는 데 몰두했다.
청은 날로 강해졌고,
조선은 여전히 외교적으로 조심스러웠다.
북벌은 결국, 단 한 번의 실전도 없이
문서와 보고서, 군사훈련으로만 남았다.
효종은 전쟁을 하지 못하고 죽었고,
조선은 북벌이란 두 글자를 명분의 고서(古書) 속에만 남겨두었다.
예송논쟁 — 조선은 슬픔마저 정쟁으로 만들었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18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조용한 성격이었고, 학문에 밝았지만, 조정은 조용하지 않았다.
이번엔 슬픔이 싸움이 되었다.
1660년과 1674년, 두 번의 예송이 터진다.
이른바 예송논쟁(禮訟論爭).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효종이 죽자, 그의 아내가 3년상을 입어야 하느냐, 1년상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조정이 둘로 갈라졌다.
동인은 “효종은 왕이었으니, 왕비는 3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서인은 “적통이 아니므로 1년상만 입으면 된다”고 했다.
지금 보면 사소한 것 같지만,
당시의 상복은 정통성과 권력의 상징이었다.
논쟁은 유교 경전을 들고 와 펼치고,
서로를 ‘예를 모르는 자’, ‘사문난적’이라 몰아세웠으며,
상복 하나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관직에서 쫓겨났다.
한쪽은 철학을 말했고, 한쪽은 정치 공작을 했다.
이 예송 논쟁을 통해, 조선의 붕당은 이념의 모양을 한 정치 권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서인과 남인은 이름뿐 아니라,
출신 지역, 가문, 학파, 심지어 문장의 문체까지 달라졌고,
조정은 더 이상 한 방향을 보지 않게 되었다.
숙종, 붕당을 다스린 왕이 아니라, 붕당을 이용한 왕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은 스스로를 ‘조선의 중흥군주’라 여겼다.
그러나 그의 정치 방식은 달랐다.
그는 한쪽 편에 서지 않았다.
오히려 양쪽을 번갈아 들어주며 균형이 아닌 경쟁을 유도했다.
이른바 환국정치(換局政治)가 시작됐다.
한 시기에는 남인을 중용하다가,
그들이 권세가 세지면 서인으로 교체하고,
다시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불러들이는 방식.
이 정치는 겉으론 균형 같았지만,
속으로는 조정 전체를 불신과 경쟁, 보복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숙종 시대는 붕당정치의 정점이었다.
그는 국정의 모든 줄을 자신의 손에 쥐고,
그 줄을 당겨 정국을 움직이는 정치의 연출자가 되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 — 권력이 된 여인의 자리
숙종의 정치는 조정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후궁과 중전의 싸움,
여인의 궁중 암투가 정치를 바꾸는 시대이기도 했다.
장희빈은 궁녀 출신의 후궁으로, 숙종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녀는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았고, 결국 중전의 자리를 꿰찼다.
반면 인현왕후는 서인 세력의 지지를 받았고,
조신한 덕행과 정통성을 상징했다.
그녀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중전이 되자
서인은 몰락했고, 남인이 득세했다.
하지만 정치란 바람처럼 바뀌는 것이다.
인현왕후는 결국 복위되었고,
장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무고죄로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것은 단지 여인의 비극이 아니었다.
권력이 권력으로 여성을 사용하고 버리는 방식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숙종은 정치의 줄을 다 쥐었지만,
그의 정치는 끝없는 교체와 균형 위에 있었다.
붕당은 그의 시대에 더 깊어졌고,
그 균열은 결국 다음 왕들에게 고스란히 넘어간다.
조선은 수백 년 동안 붕당을 키워왔다.
사람이 갈라지면 당이 되었고, 당이 세를 이루면 권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칼이 아니라, 말과 글과 문장으로 사람을 베었다.
숙종 시대까지 붕당은 숙성되었고,
그 정치의 독주는 백성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왕조의 중심을 흔들었다.
이 혼란의 흐름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영조다.
영조, 탕평의 이름으로 칼을 들다
영조는 궁녀 출신 무수리의 아들이었다.
즉위까지 험난한 길을 걸었고, 그만큼 붕당의 피해와 위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탕평’을 외쳤다.
"편당하지 않겠다. 모든 정파를 고르게 쓰겠다."
그는 붕당의 해체가 아니라, 붕당 사이의 균형과 견제를 통한 정국의 안정을 추구했다.
초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
정책적으로는 균형을 맞췄고, 각 당파의 온건파를 등용하며 조정을 정비했다.
또한 균역법을 시행해 병역 부담을 줄이고, 속대전을 편찬하며 법제를 정비했다.
하지만 탕평이란 말 아래에서도,
정치는 여전히 이념이 아닌 인맥과 출신, 감정의 정치였다.
탕평책은 점차 탕평파라는 또 다른 붕당을 낳았고,
영조는 결국 균형보다, 자신의 정치적 편의에 따라 등용과 숙청을 반복하는 군주가 되어갔다.
사도세자 — 한 왕이 아들을 버리는 법
영조의 그림자는 길었다.
그늘 속에 사도세자가 있었다.
사도는 학식이 깊었고, 예민했으며,
젊은 시절에는 백성의 삶에도 관심이 많았고, 군사제도 개혁을 논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조는 아들을 철저히 정치의 시선으로만 보았다.
사도가 성격적으로 불안정한 면을 보이기 시작하자,
조정은 이를 확대했고, 기록은 그의 행동을 ‘광기’로 몰아갔다.
사도의 내면이 무너져가던 그 무렵, 왕은 조용히 결정을 내렸다.
1762년,
한여름,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는다.
8일간, 물과 밥 없이,
조선의 세자는 쌀 뒤주 속에서 질식사했다.
왕이 아들을 죽였고,
아버지가 아들을 정치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그날 이후, 조선의 하늘은 더는 깨끗하지 않았다.
정조, 아버지의 복수를 꿈꾼 개혁군주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열한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기억했다.
모든 정쟁과 음모, 눈빛과 침묵까지.
그는 오래 기다렸고, 철저히 준비했다.
1776년 즉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밝혔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복권시키고,
그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정치 세력들을 서서히 밀어냈다.
그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등용했다.
그들은 서얼이거나 당파에 속하지 않은 인재들이었고,
정조는 그들을 통해 개혁의 새 기류를 만들었다.
군사적으로는 장용영을 설치해 왕권을 뒷받침했고,
경제적으로는 신해통공(1791)을 시행하여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시장 자유를 확장했다.
정조는 짧은 시간 안에 조선의 정치, 문화, 군사, 경제를 다시 설계하려 했다.
수원에 화성을 건설하며 실학을 통한 국가의 재건을 상징적으로 구현하려 했고,
실제로 조선 후기 가장 활력 있는 시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 역시 외로웠다.
노론 벽파는 여전히 그를 경계했고,
왕권은 언제나 암살과 쿠데타의 불안 속에 놓여 있었다.
정조는 어릴 때부터 죽음에 익숙한 왕이었고,
그는 늘 주변을 의심하면서도, 그 안에서 사람을 쓰고 나라를 움직였다.
1800년, 정조는 갑작스레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두고 많은 이들이 음모를 말했지만,
진실은 기록되지 않았고,
기록된 것만 남아 ‘역사’가 되었다.
정조 이후 — 다시 흐려진 하늘 아래
정조가 세운 개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아들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정치는 다시 왕실 외척과 붕당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세도정치의 서막.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외척 가문이 왕위를 조종했고,
조정은 개혁보다는 사리사욕, 정책보다는 안위,
그리고 백성보다는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 데만 몰두했다.
백성은 다시 굶기 시작했고,
천주는 몰래 퍼졌고,
새로운 종교와 사상이 불온하다고 찍혔고,
농민은 곳곳에서 봉기를 준비했다.
정조가 그토록 세우려 했던 이상은
이제 다시 낡은 문짝 뒤로 밀려났다.
정조가 죽자, 조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속도로 무너졌다.
개혁이 멈추고, 외척이 권력을 쥐었고, 왕은 그저 상징이 되었다.
백성은 다시 땅에 엎드려야 했고,
관리는 민란을 예방하기보다 상납과 인사를 걱정했다.
왕조는 여전히 하늘 아래에 있었지만,
그 뿌리는 썩어가고 있었다.
순조, 헌종, 철종 — 보이지 않는 왕들
정조의 아들 순조는 열한 살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실권은 그의 장인인 김조순,
즉 안동 김씨 일가가 쥐었다.
이후 19세기 내내 조선의 권력은 외척 가문의 것이었다.
풍양 조씨, 안동 김씨.
그들은 관직을 팔고, 상납을 받고, 인재를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값을 매겼다.
왕은 허수아비였고,
정치는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의 싸움이 되었으며,
정책은 기록이 아닌 형식으로만 존재했다.
헌종, 철종 역시 비슷했다.
정권은 장인과 척족들의 손에 있었고,
백성은 점점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정조가 죽은 1800년 이후,
조선은 거대한 무관심의 땅이 되었다.
홍경래의 난 — 북쪽에서 터진 분노의 첫 신호
1811년.
함경도 지역에서 홍경래라는 인물이 봉기를 일으킨다.
그는 평안도 출신 양반이었지만,
지방의 차별과 중앙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이 지역은 유난히 중앙의 차별과 무시에 시달렸던 곳이었다.
그는 몰락한 농민, 평민, 노비, 심지어 중인과 천민까지 모았다.
"이 나라는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그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칼은 날카로웠다.
홍경래는 2만이 넘는 병력을 모아
관군을 무찌르고 청천강 이북을 장악했다.
조정은 처음엔 무시했다.
그러나 상황이 심각해지자 급히 병력을 파견했다.
결국 봉기는 진압됐지만,
그 사건은 민란이 단순한 생계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위기라는 경고를 남겼다.
홍경래는 패했지만,
그의 싸움은 ‘백성도 국가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최초의 주장이었다.
천주교 — 금서처럼 퍼져나간 신의 말
18세기 후반부터 서학, 곧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왔다.
처음엔 몇몇 학자들이 ‘서양의 학문’으로 받아들였다.
천주교의 평등사상, 영혼 불멸, 내세 신앙은
조선의 유교적 질서에 위협이자 충격이었다.
조정은 처음엔 주시만 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탄압에 나섰다.
천주교는 역모의 씨앗, 국가 질서 파괴, 조상 제사 거부라는 명목 아래
탄압당했고,
수천 명이 죽고, 수만 명이 유배됐다.
하지만 죽는다고 끝나지 않았다.
신앙은 피 위에 다시 뿌리 내렸고,
산속과 마을 어귀, 이름 없는 작은 성당에서 신자들은 다시 기도했다.
천주교는 박해를 견디며 하층민과 여성에게 퍼졌고,
그들은 더 이상 조선을 믿지 않았다.
그들의 구원은 하늘과 직접 연결된 세계에 있었다.
동학 — 땅 위에서 태어난 신앙
19세기 중반,
조선의 하층민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사상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 이름은 동학.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말로 시작된 신앙.
최제우는 경주에서 태어나,
나라의 부패와 백성의 고통을 보며
서학(천주교)에 대항할 새로운 사상을 꿈꿨다.
그는 도를 닦고 글을 쓰고, 백성을 모으며
'시천주(侍天主)', 곧 사람 안에 하늘이 깃들었다는 사상을 설파했다.
동학은 유교의 권위, 불교의 허무, 천주교의 외래성을 모두 넘어서려는
조선 내부에서 자란 새로운 신앙이자,
민중의 정신혁명이었다.
조정은 동학을 불온한 이단으로 규정했고,
최제우는 1864년, 대역죄인으로 처형됐다.
하지만 씨앗은 이미 뿌려졌다.
동학은 조용히 뿌리 내렸고,
훗날 조선 최후의 민란, 동학농민운동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흥선대원군 — 나라의 문을 닫은 사내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왕실은 먼 친족인 고종을 어린 나이에 즉위시켰다.
실권은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넘어갔다.
흥선은 짧지만 강력한 집권 기간 동안
조선을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되돌리려 했다.
그는
– 서원 47개를 정리해 사림 세력을 견제했고,
– 경복궁을 중건하며 왕권의 상징을 복원했으며,
– 양반과 상민 구분 없는 세금 징수를 시도했고,
– 서양 세력을 적으로 간주하며 문을 걸어잠갔다.
그는 처음으로 ‘세도’가 아니라 결단하는 실력자였고,
사람들은 오랜만에 등장한 ‘진짜 정치인’을 지켜봤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점점 고립시켰고,
쇄국정책은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선을 단절된 섬처럼 만들었다.
외세는 이미 문을 두드리고 있었고,
조선은 그 문을 잠그고 귀를 막고 있었다.
조선은 500년 가까이 문을 닫고 있었다.
스스로가 세계의 중심인 줄 알았고,
하늘과 지식, 권력과 도덕이 모두 경복궁 안에서 돌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밖은 달랐다.
세계는 총을 만들고, 기차를 세우고, 자본을 움직였다.
조선이 여전히 예법과 위엄으로 정치를 하던 사이,
서양은 이미 힘의 언어로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그들은 강화를 요청한 게 아니라,
선언하듯이 상륙했다.
강화도 조약 — 근대의 문이 열리던 날
1875년, 운요호 사건.
일본 군함이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고, 조선 수비대와 충돌한다.
이 사건은 ‘도발’이었지만, 일본은 이를 빌미 삼아 조약 체결을 요구한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조선은 불평등 조약을 맺고,
부산·원산·인천을 일본에 개항한다.
이 조약의 핵심은 세 가지였다.
– 조선은 자주국이다 (명나라-청나라와의 조공관계 부정)
– 해안 측량 허용 (군사정보 제공)
– 치외법권 인정 (일본인이 조선에서 일본법 적용)
조선은 이 조약으로 스스로 ‘중화에서 벗어난 나라’임을 인정했고,
그 순간부터 제국주의 열강의 먹잇감이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 상황을 막고자 다시 정권을 쥐려 했으나,
결국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 세력에 밀려 다시 물러나게 된다.
그 후부터 조선의 조정은 끊임없이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줄을 타는 정치로 돌아섰다.
동학농민운동 — 밑바닥에서 솟은 저항의 깃발
1894년.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봉기한다.
그들은 동학을 믿었고,
조선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처음엔 탐관오리와 지방 수령의 부패에 맞선 질서 회복 운동이었다.
그러나 곧 전국으로 번졌고,
백성들은 외쳤다.
“보국안민(輔國安民),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폭정을 없애고, 민중을 구하겠다.
이 운동은 단순한 봉기가 아니었다.
백성이 처음으로 스스로의 말로 나라를 말한 사건이었다.
조정은 이를 진압하지 못했고,
청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한다.
청이 움직이자, 일본도 군대를 보낸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청일전쟁이다.
전쟁은 조선 땅에서 벌어졌지만,
조선은 전쟁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농민군은 2차 봉기를 일으켰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에 의해 패배한다.
전봉준은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는 조용히 웃었다고 한다.
"나는 하늘을 믿고, 백성을 믿었다"고.
갑오개혁 — 총칼 아래 시작된 개혁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은 조선 조정에 근대화 개혁을 강요한다.
이것이 갑오개혁이다.
개혁은 겉으론 신분제 철폐, 과거제 폐지, 재정 일원화 같은 근대화를 담고 있었지만,
실상은 일본식 통치 구조를 심기 위한 사전 정비 작업이었다.
왕실과 조정은 이에 반발했지만,
무력 앞에서 그들은 목소리를 잃었다.
백성들에게는 ‘양반도 평민도 없다’는 말이
좋은 소식이기도 했지만,
변화는 너무 급했고, 설명은 없었으며,
백성은 그저 또 다른 방식으로 통제당하고 있었다.
을미사변 — 칼날이 중궁전을 덮쳤다
1895년, 일본은 개혁을 방해하는 존재로
명성황후(민비)를 지목한다.
그녀는 청과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며
일본 견제에 나서고 있었고,
일본은 이를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일본 낭인(浪人)들이 경복궁 중궁전을 침입해
명성황후를 칼로 찔러 살해한 뒤,
불에 태워버린다.
그날 새벽, 왕은 숨었고,
조정은 공포에 얼어붙었으며,
조선은 외세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 사건은 조선을 충격에 빠뜨렸고,
그 여진은 아관파천이라는 또 다른 굴욕으로 이어진다.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선포 — 형식만 남은 주권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것이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왕이 왕궁을 떠나 외국 대사관으로 피신한 전무후무한 사건.
조선은 더 이상 ‘자주국’이 아니었다.
이후 1897년, 고종은 다시 환궁하고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다.
황제 즉위를 선포하며, 자주독립을 선언하지만,
이미 국권은 흐릿했고,
근대화는 선언뿐이었고,
열강의 조선 침탈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은 스스로의 힘으로 시작된 나라였지만,
그 마지막은 스스로의 힘으로 끝내지 못했다.
명분으로 버텨왔고, 예로 다스렸고, 말로 나라를 운영해왔던 그 질서는
총과 조약, 협박과 침묵 앞에서 허물어졌다.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 문턱에서,
조선은 ‘대한’이라는 이름을 걸고 존재를 연장하려 했다.
고종의 마지막 외교 — 세계는 듣지 않았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다.
조선은 그 전쟁의 무대였고,
전쟁이 끝난 뒤 조선의 주인은 사실상 일본이 되었다.
을사년,
일본은 고종에게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조약,
즉 을사조약(을사늑약)을 강요한다.
고종은 거부했지만,
일본은 군대를 동원했고,
이완용을 포함한 다섯 명의 대신(을사오적)이 비밀리에 조약에 서명한다.
그날 밤, 경복궁에는 왕의 도장이 없는 조약이 걸렸다.
고종은 즉시 무효를 선언했지만,
세계는 조선의 편이 아니었다.
1907년, 고종은 몰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한다.
그들은 조선이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겼음을 국제사회에 호소했지만,
회의장 입장조차 거부당했다.
그 소식을 들은 고종은 병석에 앓았고,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조선은 마지막 외교를 시도했고, 세계는 외면했고,
왕은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순종 — 조선의 마지막 왕
1907년, 순종 즉위.
그는 아버지 고종보다 말이 적었고,
정치적 야망도 없었다.
그의 즉위는 일본이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정지 작업이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체결.
조선은 국권을 상실하고,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된다.
이 조약은 법적으로도 위법이었고,
절차적으로도 불법이었지만,
힘은 언제나 명분을 눌렀다.
그리고 그 해 10월,
모든 관청과 궁궐 위에 일장기가 걸렸다.
의병, 사라지지 않은 마지막 저항
그러나 사람들은 나라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1890년대부터 의병전쟁은 이어지고 있었고,
1905년 이후에는 을사의병이 전국 곳곳에서 봉기했다.
의병장은 더 이상 양반만이 아니었다.
농민, 퇴직 군인, 중인, 승려, 심지어 여성까지.
칼을 들 줄 몰라도, 죽을 각오는 했다.
민종식, 신돌석, 전해산, 허위, 최익현, 홍범도...
수많은 이름들이 기록되었고,
더 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국왕이 싸우지 못했기에,
스스로 백성이 되기를 멈추고,
전사가 되었다.
그러나 의병은 군대가 아니었고,
보급도, 무기도, 외교도 없었다.
그들의 총은 낡았고,
그들의 피는 많았다.
1910년 이후, 의병은 대부분 진압되거나 스스로 산속에 스러졌다.
그러나 그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그 불씨는 태극기와 만세 소리로 바뀌어,
전국으로 다시 번지게 된다.
끝과 시작은 종종 같은 자리에 있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은 공식적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종은 이듬해 창덕궁에 머물다 죽었고,
순종은 1926년까지 아무 말 없이 살다 죽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궁을 올려다보았고,
궁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조선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 조선을 가슴에 품고,
무너진 나라 위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며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이로써 35년간 이어졌던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가 공식적으로 종식되었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해방은 자주적 독립의 결과가 아니었다.
해방 직후 조선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각각 남과 북으로 분할 점령되었고, 이는 훗날 한반도의 분단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국면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유엔의 감시 아래 남한 지역에서 단독 총선이 실시되었고, 이를 통해 구성된 국회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같은 해 헌법이 공포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 왕조 체제 이후 최초의 현대적인 국민국가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는 3년간의 미군정 시기를 마무리하고, 국제 사회로부터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인정받는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