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 고려를 되찾다 고려의 하늘은 흐려 있었다. 왕은 있었으나, 왕이 아니었다. 원나라의 힘이 강했고, 고려의 왕조는 그들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원나라에서 왕을 세우고, 원나라에서 왕을 폐위했다. 고려는 고려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거부한 왕이 있었다. 그는 왕이었으나, 원나라의 신하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고려를 고려답게 만들고 싶었다. 그의 이름은 공민왕. 그는 고려를 되찾으려 했다. 고려를 원나라의 손에서 빼앗아, 다시 고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반원 개혁, 원나라의 그늘에서 벗어나다 공민왕이 즉위한 것은 1351년이었다. 고려는 이미 원나라의 지배를 받은 지 오래였다. 왕조차도 원나라에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다. 왕의 뒤에는 원나라의 관리가 있었고, 고려의 귀족들은 원나라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 질서를 깨뜨렸다. 그는 원나라의 옷을 벗어던졌다. 고려의 왕이 원나라의 옷을 입고, 원나라의 말을 쓰는 것을 그는 거부했다. 그는 원나라에서 파견된 정동행성을 폐지했다. 그것은 고려를 직접 통치하는 원나라의 기관이었다. 그것이 사라진 것은 고려가 다시 독립적인 나라가 된다는 뜻이었
충숙왕, 두 나라 사이에 선 왕 고려의 왕은 하나였다. 그러나 그 왕이 바라보는 곳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고려였고, 하나는 원나라였다. 왕이지만, 온전히 고려의 왕일 수 없었다. 원나라의 허락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었고, 고려의 백성들은 왕을 올려다보면서도 그 위에 있는 또 다른 힘을 알고 있었다. 그 혼란의 시대 속에서 한 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충숙왕(忠肅王). 그는 원나라에서 자랐고, 고려에서 통치했다. 그러나 왕의 자리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고려를 지키려 했으나, 고려는 이미 원나라의 그늘 아래 있었다. 그는 무너지는 왕권을 지켜야 했고, 흔들리는 고려를 붙잡아야 했다. 그러나 고려는 그에게 쉽지 않은 왕국이었다. 고려의 왕, 원나라의 신하 충숙왕은 원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고려의 왕자였으나, 고려에서 자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충선왕 역시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서 흔들리며 다스렸다. 그리고 충선왕이 물러난 후, 충숙왕이 고려의 왕이 되었다. 1321년, 그는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자유를 주지는 않았다. 그는 원나라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고, 고려의 왕이었지만 원나라의 신하였다. 그의
충선왕, 고려의 두 얼굴 고려의 왕은 하나였으나, 충선왕에게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다. 고려의 왕이면서도, 원나라의 신하였다. 그는 두 나라 사이에서 흔들렸다. 고려의 왕좌에 앉았으나, 그 자리조차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몽골에서 태어났고, 몽골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뿌리는 고려에 있었다. 그는 원나라의 질서 속에서 고려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고려를 바꾸려 했다. 그러나 고려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개혁을 꿈꾸다 충선왕은 단순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학문을 좋아했고,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고려가 그대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고려는 원나라의 그늘 아래에 있었고, 왕권은 약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문벌귀족들은 고려의 정치를 장악하고 있었고, 왕조차도 그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충선왕은 그 벽을 깨려 했다. 그는 새로운 법을 만들었다. 정방을 폐지했다. 정방은 고려의 인사권을 장악한 기관이었다. 문벌귀족들은 정방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충선왕은 그것을 없애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반발했다. 왕이 모든 것을
충렬왕, 고려의 굴복과 변화 고려의 하늘이 흐려졌다. 몽골의 군대가 국경을 넘었고, 전쟁은 끝날 줄 몰랐다. 왕은 수도를 버리고 강화도로 피신했다. 고려의 땅은 몽골의 발길에 짓밟혔고, 백성들은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이제 고려는 선택해야 했다. 끝까지 싸울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을 것인가. 고려의 왕실은 굴복을 선택했다. 몽골의 힘을 인정하고, 그들의 질서 속에서 고려를 지켜나가기로 했다. 그 선택의 중심에 한 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충렬왕(忠烈王). 그는 왕이었지만, 고려의 왕이면서도 몽골의 신하였다. 그는 고려를 지키려 했으나, 고려를 온전히 지킬 수는 없었다. 개경으로 돌아오다 충렬왕이 왕이 된 것은 1274년이었다. 그는 고려의 첫 번째 충(忠) 자 왕이었다. 이전의 왕들은 몽골에 끝까지 저항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싸울 수 없었다. 몽골은 고려를 완전히 장악했고, 고려는 결국 항복했다. 충렬왕은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원나라의 황실과 혼인 관계를 맺고, 고려 왕위를 인정받았다. 고려는 더 이상 독립적인 왕국이 아니었다. 고려의 왕은 원나라의 신하가 되었고, 모든 중요한 결정은 원나라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고려 이자겸, 권력을 탐한 사내 고려의 궁궐은 조용하지 않았다. 왕이 앉아 있는 왕좌 뒤편,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권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왕이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그 명령이 곧바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왕은 강해야 했다. 그러나 왕보다 더 강한 자가 있었다. 그 자는 왕족이었으나, 왕이 아니었다. 신하였으나, 왕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고려의 정치 한가운데에서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흔든 자, 그의 이름은 이자겸(李資謙). 그는 왕을 조종하려 했고, 결국 왕이 되려 했다. 그러나 권력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왕실과 하나가 된 사내 이자겸은 고려의 유력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귀족이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고려 왕실과 연결되어 있었고, 그는 그 인연을 이용했다. 그가 선택한 길은 단순했다. 왕과 가까워지는 것. 그러나 그는 단순히 왕의 신하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는 왕이 가진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 방법은 혼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왕비로 만들었다. 한 명도 아니었다. 네 명의 딸을 고려 인종의 왕비로 들였다. 왕의 장인은 곧 왕의 후견인이었다. 왕실은 이제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은 그의 사위였
강감찬, 하늘이 내린 장군 고려의 하늘은 불안했다. 북쪽에서 몰려오는 거란의 바람은 매서웠고, 나라를 위협하는 적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려는 싸워야 했고, 이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신하였으나, 칼을 들 줄 알았고, 장군이었으나, 책을 놓지 않았다. 고려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이름은 강감찬(姜邯贊). 그는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고려를 지킨 영웅이었다. 귀주 대첩, 거란을 무너뜨리다 1010년, 고려는 위기에 처했다. 거란의 2차 침입이었다. 왕은 피난을 떠나야 했고, 수도 개경은 불타올랐다. 고려는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018년, 거란은 다시 침략해 왔다. 이번에는 더 강한 군대를 이끌고 왔다. 고려를 완전히 무너뜨리려 했다. 강감찬은 조정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다. 왕은 그에게 고려의 운명을 맡겼다. 강감찬은 병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거란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는 단순히 싸우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적을 유인했다. 거란군을 고려 깊숙이 끌어들였다. 그들이 방심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귀
고려 최우, 권력을 다스린 자 고려의 권력은 칼 위에 있었다. 왕이 명령을 내리지만, 그 명령을 따르는 자는 없었다. 왕은 있었으나, 왕국은 무신들의 것이었다. 그 혼란의 중심에서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고려를 다스리는 자였으나 왕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고려를 움직였으나, 왕좌에 앉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최우(崔瑀). 아버지 최충헌이 무신정권을 세웠고, 그는 그 정권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단순히 이어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무신정권을 완성시킨 사람이었다. 교정도감을 손에 넣다 최우는 조용히 권력을 잡았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버지 최충헌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그 뒤를 이었다. 무신정권을 이어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길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무신들 사이에서도 힘의 균형이 필요했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했고, 조금만 방심하면 권력을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는 먼저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장악했다. 교정도감은 고려의 실질적인 정치를 운영하는 기관이었다. 왕의 명령보다, 이곳에서 내려지는 결정이 더 중요했다. 최우는 그곳을 철저하게 장악했고, 모든 권력은 그의 손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군사적인 힘만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하
최충헌, 고려 무신의 시대를 열다 고려의 왕은 왕이 아니었다. 왕좌에 앉아 있었지만, 권력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신하들이 왕을 움직였고, 때로는 왕을 내쫓기도 했다. 왕은 명령을 내릴 수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나라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귀족들은 권력을 나누었고, 문신들은 학문을 이야기하며 정치를 논했다. 그러나 그 틈에서 점점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억눌린 자들 사이에서. 그리고 마침내, 무신들이 칼을 들었다. 고려의 역사는 그날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무신정변, 칼이 권력을 잡다 1170년. 문신들의 시대는 끝났다. 무신들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들은 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권력을 쥐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 싸웠다. 무신들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했지만, 누구도 완벽한 힘을 가지지 못했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나라에는 혼란만 남았다. 그 혼란 속에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1196년, 그는 칼을 들었다. 그의 이름은 최충헌(崔忠獻). 그는 기존의 무신들과 달랐다. 그는 단순히 칼을 휘두르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권력을
윤관, 북방을 개척하다 고려의 북쪽은 늘 불안했다. 국경 너머에는 여진족이 있었다. 그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움직였고, 때때로 고려의 땅을 침범했다. 고려의 백성들은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다. 윤관은 그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고려의 장군이었다. 단순히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는 결심했다. 고려는 더 이상 방어만 해서는 안 된다고. 적을 밀어내고, 새로운 땅을 개척해야 한다고. 별무반,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다 고려의 기존 군대는 강했지만, 여진족을 상대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고려의 보병들은 강했지만, 여진족의 기동력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기마 전술에 능했고, 빠르게 움직이며 고려군을 괴롭혔다. 윤관은 새로운 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보병 중심의 전력이 아니라, 기병을 활용한 전략적 부대가 필요했다. 그는 고려 역사상 최초로 기병 중심의 군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했다. 별무반은 크게 세 부대로 나뉘었다. 신기군(神騎軍) – 고려의 정예 기병부대. 여진족의 기마 전술에 대응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신보군(神步軍) – 강력한 보병부대. 기병을 보조하며 전투의 중심을
김부식, 고려의 역사를 기록하다 고려의 땅은 넓었고, 바람은 거칠었다. 왕이 앉아 있는 개경에서는 조용한 듯했지만, 나라 곳곳에서는 새로운 변화의 기운이 일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려를 더 강하게 만들겠다고 했고, 누군가는 고려의 뿌리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김부식은 후자였다. 그는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았다. 고려는 이미 오래된 나라였고, 그 안에서 질서가 필요했다. 그는 변화를 멀리하고, 안정 속에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항상 바람처럼 불었다. 그는 그 바람을 잠재우려 했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유교적 통치를 지키다 김부식은 고려의 문신이었다. 그는 단순한 관리가 아니었다. 그는 고려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했고, 그것을 지키려 했다. 고려는 본래 불교의 나라였다. 그러나 김부식은 유교를 기반으로 한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교의 가르침이 곧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 믿었다. 군주는 백성을 다스리고, 신하는 군주를 보좌해야 한다. 그러려면 문벌귀족이 중심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왕과 함께 고려를 이끌어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변화는 항상 불쑥 찾아왔고,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