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국민당 정부 이주와 장제스 체제 — 전환의 시간
1945년,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일본은 항복했다.
대만은 반세기 만에 다시 새로운 이름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중화민국의 이름으로.
그러나 이 새로운 통치는 환영받은 것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억압이 끝나기를 바랐던 대만인들은, 또 다른 억압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당시 대륙의 국공 내전은 격렬하게 진행 중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 패망 직후 혼란 속에 대만 행정을 인수했다.
장제스 정권은 대만을 전후 복구와 반공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 접근은 대만 사회의 복잡한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
국민당이 파견한 관료들은 종종 본토에서 부패와 무능으로 악명 높던 관리들이었다.
그들은 일본 식민 체제의 인프라를 장악하는 데 급급했고,
민생 문제는 뒷전이었다.
물가는 폭등했고, 통화 개혁은 실패했다.
시장에는 가짜 상품과 암거래가 판쳤다.
그 와중에 공공 자산은 사유화되었고, 국민당 관료들과 그 측근들은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대만인 사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일본인보다 더 못한 지배자들이다.”
이런 말이 골목마다 돌았다.
그 분노는 곧 폭발했다.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에서 한 노파가 암시장에서 담배를 팔다가 단속 공무원에게 구타당했다.
그 광경을 본 군중은 분노했고, 시위가 일어났다.
다음날, 민중은 방송국과 관공서를 점거했다.
‘2·28 사건’의 서막이었다.
사건은 순식간에 섬 전역으로 번졌다.
민중은 민주적 자치와 부패 관료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국민당 정부는 협상보다 탄압을 선택했다.
중국 본토에서 파병된 군대가 대만에 상륙했다.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체포, 학살당했다.
지도자, 지식인, 학생 — 대만 사회의 미래가 될 이들이 사라졌다.
섬에는 다시 공포가 깃들었다.
2·28 사건 이후, 국민당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통제를 강화했다.
이 시기는 ‘백색 테러’의 시대라 불린다.
정치적 반대는 금지되었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사라졌다.
밤이면 경찰이 들이닥쳤고, 가족들은 누군가 사라진 뒤에도 감히 이유를 묻지 못했다.
동시에, 대륙의 상황은 더 급박해졌다.
1949년, 국민당 정부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했고,
장제스는 대만으로 철수했다.
약 150만 명의 본토인이 함께 섬으로 건너왔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정부·군·지식인 계층이었다.
이로써 대만 사회는 새로운 분열 구조를 갖게 된다.
본성인(本省人) — 오랜 세월 대만에 살던 이들, 일본 식민지 시절을 경험한 대만인들.
외성인(外省人) — 국공내전 패배 후 본토에서 건너온 이들.
정치 권력은 외성인이 장악했다.
본성인은 관료 조직에서 배제되었고,
사회적·문화적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 경제 발전의 기반도 마련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대만에서 ‘전시 체제적 개발 독재’를 구축했다.
토지 개혁이 이루어졌고, 대지주 중심의 불평등한 구조가 일부 해소되었다.
미국의 원조가 본격화되었고, 경공업 중심의 수출 경제가 태동했다.
대만 기적이라 불릴 경제 성장의 씨앗이 이 시기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 기적의 그늘에는 공포 정치와 사회적 억압이 존재했다.
언론은 통제되었고,
정적은 감옥과 총살형으로 제거되었다.
비밀 경찰의 눈길은 모든 곳에 존재했다.
그렇지만, 저항은 꺾이지 않았다.
밀실에서, 해외에서, 그리고 후일 젊은 세대의 마음속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자라나고 있었다.
장제스의 강권 통치는 그 아들 장징궈 시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은 멈춰서지 않았다.
세계는 변하고 있었고,
대만 역시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시점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섬은 다시 물었다.
“우리는 누구인가?”
그 질문은 이제 더 날카롭게, 더 깊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8장. 민주화와 본토화 — 질곡이 만든 꽃
바람은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강철 같은 통제의 시대는 길었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
1970년대 말, 대만 사회는 겉으로는 안정되어 보였다.
경제는 급성장하고 있었다.
'대만 기적'이라는 말이 세계 경제지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수출 중심의 경공업, 뒤이어 첨단 산업.
삶의 수준은 높아졌고, 도시의 불빛은 더욱 밝아졌다.
그러나 빛 아래 어둠은 더 짙었다.
계엄령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정당 활동 금지, 언론 검열, 정적 탄압 —
국민당 일당 독재 체제는 자유와 표현의 욕구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다른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해외 유학파, 젊은 노동자들, 지식인들 —
그들은 자유와 인권이라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 돌아왔다.
이제 대만 안에서 금기의 언어들이 은밀히 퍼지기 시작했다.
1979년, 가오슝에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가오슝 사건(美麗島事件) —
비합법적 민주화 운동 잡지인 『미려도』 편집진과 민주 인사들이
세계 인권 선언 기념 집회를 시도했다.
국민당 정권은 이를 폭력으로 진압했다.
수많은 활동가들이 체포되고,
그 중 일부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러나 진압이 모든 것을 끝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불을 지폈다.
국내외에서 비판 여론이 폭발했다.
젊은 세대는 그 사건에서 새로운 각성을 경험했다.
“이 체제를 더는 용납할 수 없다.”
1980년대 초, 국제 환경도 변화하고 있었다.
미·중 수교, 냉전 완화, 글로벌 민주화 물결 —
대만 정권도 더는 고립된 섬 안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내부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蔣經國)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점진적 개혁을 모색했다.
1987년, 계엄령 해제 —
38년 만이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확대되었고,
정당 결성이 허용되었다.
대만 사회는 급격히 요동쳤다.
거리에는 새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진당(民主進步黨)이 등장했고,
시민 운동과 노동 운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민주화는 단순히 제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정체성의 문제가 다시 전면에 떠올랐다.
1980년대 후반부터,
대만인들은 스스로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중국인인가, 대만인인가?”
그 질문은 단순한 언어적 문제가 아니었다.
역사의 기억과 억압,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
민주주의와 독재의 과거 —
모든 것이 그 질문에 뒤섞여 있었다.
민진당은 '본토화(本土化)'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대만인의 주체적 역사를 강조했고,
대만어 사용의 부활을 주장했다.
학교에서는 다시 대만 역사 교육이 시작되었다.
민중 속에서는 “중화민국=대만”이라는 등식에 대한 의문이 커졌다.
정치적으로도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1996년, 대만 최초의 직접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리덩후이(李登輝) —
그는 본성인 출신으로,
대만 최초로 직접 선출된 대통령이 되었다.
그 순간, 대만은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 정치로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본토화는 내부적 논쟁을 낳았다.
보수 세력은 '하나의 중국' 정체성을 여전히 고수했고,
민주화 진영은 대만 중심의 새로운 정체성을 주장했다.
사회는 분열적이었지만,
그 분열 속에서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2000년,
민진당의 천수이볜(陳水扁)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당은 처음으로 정권을 내주었다.
대만 민주주의의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제 대만은 더 이상 군부독재의 섬이 아니었다.
자유로운 선거, 활발한 시민사회, 다양한 언론 —
그러나 동시에 정체성 논쟁과 국제적 고립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곡 속에서 피어난 민주주의라는 꽃은 쉽게 시들지 않았다.
대만인들은 이제 스스로 묻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만의 미래를 만들 수 있는가?”
그 질문은 앞으로도 대만의 정치와 사회를 끊임없이 이끌어가는 질문으로 남게 된다.
9장. 국제적 지위와 양안 관계 — 바다 위 돛의 운명
바다는 늘 경계 없는 길이었지만, 동시에 경계 그 자체이기도 했다.
대만 해협.
가장 좁은 곳에서 130킬로미터 남짓한 바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정치적 균열이 숨쉬고 있다.
하나의 중국 —
그 짧은 구호가 이 좁은 바다를 깊은 틈으로 만들었다.
1971년, 유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되었다.
그 순간 중화민국(대만)의 국제적 지위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외교 관계는 끊기고, 대만은 점점 외교적 고립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현실은 단순한 외교 고립 이상의 것이었다.
“국가란 무엇인가?”
대만인들은 그 질문을 다시 묻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대만은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ROC)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대만인은 스스로를 대만인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틀에 자신들을 묶어두기를 원하지 않았다.
중국 본토는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만은 중국의 불가분의 영토” —
이것이 베이징의 공식 입장이었고,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만의 민주화 이후
양안 관계는 단순한 정부 간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로 변화했다.
1992년, 양측은 '92공식'이라는 모호한 합의에 이른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인정하되, 해석은 각자 다르게 한다.”
그러나 그 애매한 문구는 결국 서로 다른 꿈을 담은 그릇이었다.
21세기로 들어서면서
중국은 경제적·군사적 힘을 키웠고,
대만에 대한 군사적 압박과 외교적 고립 전략을 강화했다.
대만은 이에 맞서
미국, 일본, 유럽과 비공식적 동맹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언제나 불안정했다.
미국조차 '하나의 중국 정책'을 유지하면서
대만관계법을 통해 군사적 지원만 보장하는 복잡한 입장을 고수했다.
국제 무대에서
대만은 “중국 타이완”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참여하거나,
아예 배제되기도 했다.
WHO, ICAO, UN —
대만은 자주 국제사회의 문턱에서 멈추어야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대만은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갔다.
경제는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반도체 산업 —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가진 TSMC는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는 무기가 되었다.
동시에,
대만 사회 내부에서는 독립 정체성이 더 강해졌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만 젊은 세대는 점점 더
“나는 대만인이다”라고 자처했다.
“나는 중국인이다”라는 응답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중국 본토에게는 도발로 인식된다.
군용기 출격, 해상 봉쇄 훈련 —
군사적 압박은 점점 더 노골적이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만 사회는 공포에 휩싸이지 않는다.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
자신들만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확신 —
이것이 대만을 지탱하는 힘이다.
그러나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독립 선언은 가능한가?
그 대가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중국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자율적 정체성을 유지할 길은 있는가?
이 질문들은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바다 위의 돛은 여전히 불확실한 바람 속에 흔들리고 있다.
국제 질서의 변화,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균형 —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대만은 스스로의 길을 찾기 위한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
섬의 사람들은 알고 있다.
과거에도 우리는 바다를 넘어왔다.
앞으로도 우리는 바다를 넘어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그것은 여전히 열린 질문으로 남아 있다.
10장. 결론 — 미래로 향하는 섬의 내면
섬은 멈추지 않는다.
바람도, 파도도,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그러하다.
수천 년 전,
처음 카누의 노를 저어 이 섬에 도착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별을 보고 길을 찾았다.
그리고 지금, 대만이라는 이름을 지닌 이 섬은
또 다른 별을 찾아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그 항해는 쉽지 않다.
대만은 여전히 질문 속에서 살아가는 섬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 물음은 어쩌면 대만 현대사의 가장 깊은 층위에 놓여 있다.
원주민의 땅, 한족 이민자의 땅, 일본 식민지의 땅, 국민당 망명 정부의 땅 —
모두가 이 섬에 각자의 기억을 남겼다.
그 기억들은 서로 다른 속도로 호흡한다.
가오슝의 시장 골목에서는 대만어가 자유롭게 울리지만,
중정기념당 앞 광장에서는 여전히 국민당 깃발이 펄럭인다.
원주민 촌락에서는 잊혀진 언어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젊은 세대는 SNS에서 대만이라는 브랜드를 자랑스럽게 내세운다.
섬의 내면은 균일하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 다층적이고 균열된 내면이 대만의 힘이자 약점이다.
외부에서는 종종 대만을 단일한 이미지로 소비하려 한다.
반도체 강국, 민주주의의 전초기지, 중미 패권 경쟁의 불씨.
그러나 그 모든 정의는
이 섬에서 실제로 살아가는 이들의 목소리를 담기엔 너무 작다.
대만은 단순한 전략적 요충지가 아니다.
여기엔 삶이 있다.
이름 없는 작은 찻집의 주인이 있고,
새벽 시장의 노파가 있으며,
도심 아파트에서 게임을 만드는 청년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만의 대만을 만들어가고 있다.
앞으로 대만은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독립 선언?
현상 유지?
통일?
정답은 없다.
그리고 대만인들은 그 불확실성을 무겁게 끌어안고 살아간다.
정치적 선택 너머에서,
대만은 삶의 방식을 지키는 싸움을 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제도만이 아니라,
자유롭게 말하고, 노래하고, 기억하고, 사랑할 수 있는 방식을 지키려는 싸움이다.
그 싸움은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의 군사적·외교적 압박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국제사회는 언제까지나 애매한 동맹으로만 남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섬은 이미 많은 것을 견뎌왔다.
식민지 시대도, 백색 테러도, 고립과 외로움도.
그리고 매번 새로운 이름과 목소리로 다시 일어섰다.
이제 대만은 다시 바다를 바라본다.
바다 너머에서 올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바다 안쪽에서 자라난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과거는 아직 이 섬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에만 머물 생각도 없다.
대만은 앞으로도
스스로의 이름으로 세계 속에 설 방법을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끝나서는 안 될 것이다.
섬의 이야기는 계속 흐를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