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인간은 외롭지 않다고 믿고 싶다 팔로워 수는 늘어나고, 피드는 늘 화려하다 하지만 정작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진짜 감정보다 잘 포장된 감정이 먼저 도착하는 시대 SNS는 공감의 공간이 아니라 연출의 무대가 되고 있다 첫째, 좋아요는 현대인의 감정 통화가 되었다 SNS는 처음엔 감정을 공유하자는 목적에서 시작됐지만, 지금은 누가 더 잘 포장하느냐의 경쟁장이 됐다 기쁜 날은 더 기쁘게, 슬픈 날은 덜 슬프게 표현된다 그 사이에서 진짜 감정은 점점 자리 잡을 틈을 잃는다 결국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마저 디자인하게 된다 이때 좋아요는 일종의 화폐처럼 작동한다 더 많은 좋아요를 받은 감정이 더 가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SNS는 관계의 착시를 만든다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위로를 건네고, 이모티콘으로 마음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 관계는 진짜일까 정작 속이 타들어가는 날에도, 누구에게 전화해 털어놓을 용기는 사라진다 대신 익숙한 루틴처럼 사진을 올리고, 괜찮다는 척 글을 쓴다 그러고 나면 누군가가 눌러주는 하트 하나에 스스로를 위로하려 한다 그러나 그 위로는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또다시 확인하게 된다 지금
2025년, 세상이 점점 빠르게 돌아갈수록 사람들은 속도를 줄이는 법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있는 단어가 바로 아보하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저 평범한 하루에 감사하고, 작은 기쁨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 아보하는 거창하지 않지만, 삶을 단단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이제 묻기 시작했다. 꼭 대단한 일이 있어야 행복한 걸까. 첫째, 아보하는 일상의 리듬을 존중하는 삶이다. 매일 아침 커피를 내리는 순간, 고양이가 창가에서 졸고 있는 모습, 해 질 무렵 하늘에 번지는 붉은색. 특별하지 않지만 반복될수록 마음에 평온을 준다. 바쁘게 달려온 시대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성과를 요구했지만, 이제는 하루가 무사히 지나간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둘째, 아보하는 비움에서 오는 충만함을 안다. 많은 것을 갖는다고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덜어낸 자리에서 진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화려한 계획보다 오늘 먹고 싶은 음식을 정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듣는 것이 마음을 채운다. 물질이 아닌 감정과 감각으로 삶을 느끼는 이들. 이들이 바로 아보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셋째, 아보하는 비교하지 않는 단단한 자존감이다.
요즘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거나 먹는다고, 다 잘 먹는다고, 뭐든 괜찮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무거나'는 사실 하나하나 골라 낸 것들의 모음이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고를 때도,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를 때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무수한 것들을 머릿속에 펼쳐놓고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렇게 우리는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 나를 구성하고 있다. 과거에는 '전문가'라는 말이 존중받았다. 한 가지 길을 꾸준히 걸어간 사람, 한 분야에서 깊이를 더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 다양한 관심사와 취향을 가진 이들이 등장했다. 바로 옴니보어다. 뭐든지 먹는 사람, 뭐든지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의 질서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그들은 오늘은 힙합을 듣다가 내일은 클래식에 빠진다. 점심은 비건 샐러드를 먹고 저녁에는 삼겹살을 구운다. 유튜브에서는 명상 채널을 구독하면서 틱톡에서는 밈 영상을 본다. 그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고정된 중심 없이도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유연함이 그들의 강점이다. 옴니보어는 다채로움 속에서 스스로의 질서
우리는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로 '워딩'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왜 '말'이라는 한국어 대신, 굳이 '워딩'이라는 외래어를 사용할까? 이는 단순한 언어적 변화 이상의 심리적, 사회적 배경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전문성과 권위의 표현. '워딩'은 단순히 '말'을 넘어선 뉘앙스를 제공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 '언어적 권위'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외래어를 사용할 때, 그 말은 마치 더 깊은 지식이나 높은 수준의 사고를 반영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전문가나 강연자가 '워딩을 신경 쓰세요'라고 말할 때, 이는 단순히 '말을 신경 써라'보다 더 세련되고 전문적으로 들린다. 둘째, 심리적 거리감과 방어 기제. 외래어는 때로 우리에게 심리적 방어막을 제공한다. 감정적으로 민감한 주제를 다룰 때, 직접적인 한국어 표현 대신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은 감정적 부담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의 말이 상처가 됐어요'보다 '당신의 워딩이 공격적이었어요'라는 표현은 상대적으로 부드럽고, 감정적으로 덜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이는 심리적으로 우리의 자아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셋째, 트렌드와 집단 소속감. 우리는 흔히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깨끗해 보이죠?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마시는 물, 그 물 한 잔에 플라스틱 조각이 몇 개나 있을까요? 서울의 한 가정집에서 마시는 물, 제주도의 맑은 계곡물, 심지어 가장 깊은 해양에서 퍼 올린 물에서도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습니다.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죠?” 당신이 편리하게 사용했던 일회용 비닐, 배달음식의 플라스틱 용기, 그리고 매일 사용하는 치약에 들어있는 미세 알갱이까지. 이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잘게 쪼개져 결국 물로, 공기로, 우리의 몸으로 들어옵니다. 문제는 이 미세 플라스틱이 우리 몸에 축적된다는 사실입니다. 인체에 유입된 미세 플라스틱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은 그 유해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내분비계 교란 물질로 작용할 가능성, 염증을 유발할 가능성 등이 지속해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해산물에 축적된 미세 플라스틱은 우리 식탁에 직격탄을 날립니다. 연구에 따르면, 어류의 장기와 근육 조직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고 있으며, 이는 결국 사람에게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생선회, 조개 요리 등이 우리 몸에 플라스틱을 들여보내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