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복판, 세운4구역이라 불리는 지역이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오래된 골목과 낡은 건물이 뒤섞인 그곳에, 서울시는 새로운 마천루를 세우겠다고 한다. 높이는 140미터 남짓, 바로 그 건너편에는 600년의 세월을 지켜온 종묘가 있다. 이곳은 단순한 재개발 구역이 아니다. 왕조의 제향이 이어졌던 유교문화의 상징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공간이다. 그런데 최근 법원은 서울시의 손을 들어줬다. 종묘 인근의 높이 제한을 풀고, 고층건물을 세울 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결국 ‘보존’과 ‘개발’이라는 오랜 줄다리기가 또다시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시작된 셈이다. 서울시는 말한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정비가 지연돼왔고, 재개발을 통해 활력을 되찾아야 한다.” 한때 서울의 중심이었던 세운상가 일대는 산업과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도시의 공백처럼 남았다. 고층화는 새로운 인프라와 기업을 끌어들이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더 이상 낡은 건물을 보존만 하며 시간을 멈춰둘 수 없다는 논리다. 하지만 문화재 보호 단체의 시선은 다르다. 그들은 종묘의 가치를 ‘공간의 완전성’에서 본다. 단순히 건물 하나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의 하늘, 경관, 공기까지 함께
도널드 트럼프의 관세 전략은 경제정책이라기보다 권력의 언어에 가깝다. 그가 다시 꺼내든 ‘관세’는 미국이 잃어버렸다고 믿는 힘을 되찾는 상징이 됐다. 10퍼센트의 일률관세, 그리고 상대국에 대한 상호주의 추가관세. 그 단순한 구조 속에는 복잡한 계산이 숨어 있다. 트럼프는 오래전부터 무역을 손익계산서처럼 대했다. 누가 더 벌고, 누가 더 잃는가. 그의 관점에서 미국은 늘 손해를 봤고, 그 손해를 되돌리는 방법은 세금이 아니라 ‘압박’이었다. 이번 관세 전략은 그 압박의 제도화다. 전 세계의 수입품에 일률적으로 세금을 매기고, 필요하면 추가 관세로 상대를 조인다. 협상의 출발점이자, 언제든 철회할 수 있는 위협이다. 문제는 경제다. 이 전략은 정치적으로는 박수를 받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예측 가능한 결과를 낳는다. 물가 상승, 수입가격 인상, 소비 위축. 미국 내 제조업이 살아날 가능성보다 가계 부담이 늘 확률이 더 높다. 과거 철강과 알루미늄, 대중(對中) 관세 때도 그랬다. 기업들은 비용을 소비자에게 넘겼고, 결국 관세의 무게는 중산층이 짊어졌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물러서지 않는다. 관세는 그에게 정치의 언어이자 무대 장치다. 그는 “미국은 더 이상 호
손흥민의 리더십은 화려한 말이나 포장된 이미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는 경기장 위에서, 그리고 그라운드 밖에서 천천히 신뢰를 쌓아가며 리더라는 자리를 자신의 방식으로 만들어왔다. 누군가는 그를 ‘조용한 리더’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진짜 팀의 중심’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를 정의하는 가장 정확한 말은 아마도 ‘행동으로 이끄는 사람’일 것이다. 손흥민은 늘 팀을 먼저 생각했다. 화려한 개인기를 뽐내거나 자신이 돋보이는 플레이보다, 팀이 더 좋은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선택을 우선했다. 골을 넣는 대신 수비를 돕고, 상대 진영 깊숙이 들어가기보다 동료에게 공간을 열어주는 움직임을 택했다. 이런 희생적인 플레이는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였다. 그는 “팀이 이기면 그게 나의 기쁨”이라는 말을 경기마다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래서 토트넘 동료들은 그를 ‘언제나 믿을 수 있는 주장’으로 기억한다. 손흥민의 리더십은 말보다 진정성에서 비롯된다. 그는 항상 가장 먼저 뛰고, 가장 늦게까지 남는 선수였다. 경기 막판까지 숨을 몰아쉬며 압박을 이어가거나, 실패한 동료에게 먼저 다가가 등을 두드리는 장면은 수없이 목격됐다. 그에게 리더란 높은 곳에서 명령하는 사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하면 된다고 배워왔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사회도 그렇게 말해왔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말이 공허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정말 열심히 하는데, 결과는 늘 비슷하고, 삶은 제자리인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뭔가 앞서가고, 나만 같은 자리에 멈춰 있는 기분. 그럴 때 사람은 묘하게 자책하게 된다. 내가 부족해서 그런가, 노력이 모자란 걸까. 그런데 가만히 보면, 열심히 하는 것과 잘 나아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라는 단어에 갇혀 산다. 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쉴 틈 없이 움직이고, 스스로에게 ‘오늘도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된 열심은, 오히려 사람을 지치게 만들 뿐이다. 똑같은 길을 아무리 빠르게 달려도,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면 도착점은 없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잘못된 길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남들처럼’ 열심히 사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제자리인 이유는 단순히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노력을 엉뚱한 곳에 쏟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늘 회사에서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 성실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
리더십은 결국 사람의 흐름이다. 조직을 움직이는 것은 전략이나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며, 사람의 판단은 그가 가진 기운의 방향에서 비롯된다. 명리학은 그 흐름을 읽는 오래된 도구다. 사람의 생년월일시를 통해 오행의 균형을 살피고, 그 속에서 어떤 에너지가 강하고 약한지를 본다. 그러나 이것은 운명을 예언하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성향의 구조를 분석하는 프레임이다. 현대 심리학이 성격 5요인을 말하듯, 명리학은 오행(木, 火, 土, 金, 水)의 상생상극으로 인간의 리더십 패턴을 설명한다. 리더십의 다섯 기운 목(木)의 리더는 비전형이다. 나무는 자라며 뻗는다. 이들의 리더십은 성장과 확장의 방향으로 향한다. 늘 새로운 길을 찾고, 조직을 위로 끌어올리려 한다. 단점은 조급함이다. 계획보다 실행이 앞서기 쉽다. 목의 리더는 자신의 비전이 다른 사람에게 닿을 수 있도록 경청과 기다림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화(火)의 리더는 열정형이다. 불은 빛과 에너지를 낸다. 이들은 조직의 분위기를 뜨겁게 만드는 카리스마형이다. 다만 지나친 열정은 타인을 태운다. 화의 리더가 조직을 오래 이끌려면, 불의 세기를 조절해야 한다. 자기 확신을 한 걸음 내려놓고, 상대의 불씨를
한때 ‘장유유서(長幼有序)’는 사회의 기둥이었다. 나이 많은 이가 존중받고, 젊은 세대는 그 권위를 배우며 따랐다. 그러나 지금의 인터넷은 그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온라인 세계에서는 나이가 아닌 정보의 속도와 표현의 능력이 힘이 된다. 타이핑이 빠르고, 트렌드를 읽는 감각이 뛰어난 젊은 세대가 온라인의 주도권을 잡는다. 반면 연륜으로 쌓은 경험과 판단은 ‘댓글 몇 줄’에 묻히기 쉽다. 인터넷이 만들어낸 세상은 나이를 ‘숫자’로만 취급한다. 유튜브나 SNS에서는 열다섯 살이 백만 구독자를 거느릴 수도 있고, 칠십대가 조회수 30을 넘기지 못해 잊혀지기도 한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세대 역전이다. ‘연장자’는 오랜 경험을 통해 세상을 읽을 수 있었지만, 인터넷은 그 경험의 축적보다 즉각적인 공감과 반응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 결과, 나이가 많을수록 불리한 구조가 되어버렸다. 물론 세대 간 단절을 전적으로 인터넷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은 그 단절을 ‘가속화’시켰다. 과거에는 세대가 다르더라도 같은 마을, 같은 공간에서 부딪히며 살아야 했다. 지금은 세대별로 머무는 공간 자체가 다르다. 20대는 유튜브와 틱톡, 50대는 네이버와 카
서울의 어느 작은 원룸에서 새벽을 맞이하는 청년이 있다. 잠에서 깨자마자 휴대폰을 켜면 부동산 뉴스가 쏟아진다. "아파트값 또 최고가", "주식시장 연일 급등", "비트코인 1억 원 돌파". 그러나 그의 통장은 여전히 마이너스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내 집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믿음은 ‘벼락거지’라는 단어 하나에 산산이 부서졌다. ‘벼락거지’라는 표현은 원래 ‘벼락부자’의 반대말이다.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는 이가 있는 반면, 하루아침에 상대적 빈곤층으로 전락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집값과 자산이 급등하는 동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했고, 그 속도는 인간의 노동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2019년부터 2021년 사이, 대한민국의 부동산 시장은 전례 없는 폭등을 경험했다. 평범한 직장인 월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 10억 원을 넘어가자,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이라는 단어가 유행했고, 그조차도 늦은 사람들은 더 이상 진입할 틈이 없었다. 이때 태어난 단어가 바로 ‘벼락거지’다. 노력은 그대로인데, 자산을 가진 사람과
트럼프가 다시 칼을 빼들었다. 이번엔 ‘관세’라는 낡은 무기지만, 그 표적은 훨씬 더 정교하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제한하자, 트럼프는 즉각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최대 10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경고했다. 단순한 보복이 아니다. 이는 미국이 사실상 ‘경제적 냉전’의 2라운드를 선언한 것이다. 희토류(rare earth elements)는 이제 석유보다 전략적인 자원이다. 전기차 모터, 반도체, 전투기, 미사일,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현대 산업의 심장을 이루는 핵심 소재다. 지구상 생산량의 70% 이상을 중국이 쥐고 있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 지배력의 ‘진짜 위협’은 최근 중국이 자국 안보를 이유로 수출 통제에 나서며 현실이 됐다. 중국의 이 조치는 무기보다 무서운 자원 통제의 신호탄이었다. 트럼프는 이를 정치적 기회로 삼았다. “중국은 희토류를 무기화했고, 미국은 더 이상 종속되지 않겠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국 산업의 자립을 외쳤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단순한 보호무역주의를 넘어선 전략적 경제 봉쇄에 가깝다. 관세 100%는 단지 숫자가 아니다. 그건 ‘디커플링(탈동조화)’의 상징이다. 트럼프는 중국과의
‘셧다운(shutdown, 일시적 업무정지)’이라는 단어는 원래 기계나 시스템의 작동을 완전히 멈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국가’를 대상으로 쓰일 때, 그 단어는 단순한 중단이 아니라 ‘정치의 실패’를 의미한다. 2025년 10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미국은 다시금 이 단어 앞에 서 있다. 연방정부의 일부 기능이 멈추고, 수십만 명의 공무원들이 무급으로 집에 머물고 있으며, 국립공원과 연구기관, 행정 서비스가 문을 닫았다. 이것은 단지 행정적 마비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시스템이 스스로의 신뢰를 잠시 내려놓는 일이다. 미국의 정부 셧다운은 대통령제가 가진 구조적 약점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사건이다. 헌법상으로 행정부는 예산을 집행할 권한이 없고, 모든 예산은 의회가 통과시켜야만 한다. 따라서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행정부는 돈을 쓸 수 없고 정부는 문을 닫는다. 이 논리 자체는 ‘견제와 균형’의 이상에서 출발했으나, 지금의 셧다운은 그 균형이 ‘갈등의 정당화’로 변질된 모습이다. 여당과 야당은 서로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걸고 예산안을 무기로 삼는다. 한쪽은 재정긴축을, 다른 한쪽은 복지확대를 주장하며, 그 사이에서 국가는 일시적으로 숨을 멈
조용필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단순히 한 가수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한국 대중음악의 한 시대가 함께 깨어난다. 그는 한 세대를 노래했고, 또 그 노래로 다음 세대를 키웠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으면 흑백의 항구 풍경이 떠오르고, “단발머리”를 들으면 청춘의 거리가 살아난다. 조용필의 노래는 그 시절의 공기를 품은 기록이자, 세월의 흐름을 견뎌낸 한 사람의 목소리다. 조용필은 1950년대에 태어나 1970년대의 혼란 속에서 음악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그의 등장은 단순한 가수의 데뷔가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의 근대화’였다. 트로트와 포크, 록과 발라드, 심지어 팝까지 — 그는 장르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음악이 시대를 이끌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의 대표곡들에는 단순한 감정의 반복이 없다. 노래 한 곡마다 새로운 시도가 있었고, 그 실험은 늘 대중의 사랑으로 이어졌다. ‘창밖의 여자’의 애잔한 감정선은 트로트의 울림을 품었고, ‘모나리자’의 리듬은 당시 한국에서는 낯설었던 팝록의 세련미를 담고 있었다. 조용필은 늘 대중보다 반 걸음 앞서 있었다. 하지만 그가 위대한 이유는 단지 음악적 실험에 있지 않다. 그는 ‘세월을 견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