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칼날, 계백
황산벌의 대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먼지와 피가 섞인 전장 속에서 한 장수가 마지막까지 칼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백제의 충신이었고,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싸운 장수였다. 이름은 계백. 그의 칼은 백제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지만, 그의 충의는 영원히 기억되었다.
혼돈의 시대, 백제의 장군이 되다
660년, 백제는 기로에 서 있었다. 의자왕은 신라를 압박하며 과거 백제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으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은 이제 곧 공격받을 운명이었다. 나라를 지킬 최후의 전선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전선의 중심에 계백이 있었다.
그는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백제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고, 백제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의자왕은 그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황산벌을 사수하라.
황산벌 전투, 백제의 운명을 건 싸움
계백은 5천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황산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적은 너무나도 강했다. 신라군은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대군이었다. 계백은 전세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처단했다. “나라가 망하는 날, 내 가족이 적의 손에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는 마지막까지 전장에만 집중할 것을 다짐하며, 가문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백제군은 기세를 올려 신라군을 압박했고, 처음 세 번의 전투에서 신라군을 격퇴했다. 하지만 숫자의 차이는 너무 컸다. 네 번째 전투에서 백제군은 신라군의 압도적인 병력에 밀리기 시작했다. 계백은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신라군의 파도 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백제가 남긴 마지막 유산
백제는 멸망했다. 사비성은 함락되었고, 의자왕은 당나라에 끌려갔다. 그러나 계백의 희생은 백제의 정신을 후대에 남겼다. 그의 충성과 용맹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귀감이 되었고, 백제의 마지막 불꽃으로 기억되었다.
백제를 품은 유적과 유물
계백의 최후가 펼쳐진 황산벌 전투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충청남도 부여 일대에는 황산벌 기념공원과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보존되어 있으며, 계백과 그의 군대가 펼친 처절한 전투를 기리기 위한 유적들이 자리하고 있다.
백제가 남긴 문화적 유산 또한 계백이 지키려 했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백제의 불교 문화를 대표하는 석탑으로, 그 옆에 새겨진 ‘대당평백제국비’는 백제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다. 계백이 마지막까지 싸우며 지키고자 했던 백제의 정신이 이 석탑에 남아 있다.
또한, 능산리 고분군은 백제 왕실과 귀족들의 무덤으로, 계백과 같은 충신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지다. 이곳에서 출토된 금제 장신구와 백제 토기들은 백제의 세련된 문화와 예술을 증명하며, 계백이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나라가 단순한 전쟁국가가 아니라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보여준다.
백제의 군사력이 강했음을 증명하는 유물도 남아 있다. 백제에서 출토된 철제 갑옷과 검들은 계백과 같은 장수들이 실제로 사용했던 무기의 흔적이다. 이는 백제의 군사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계백이 신라군을 상대로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계백, 영원한 충신
계백은 전사했지만, 그의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백제의 멸망 속에서도 그의 용기는 살아남았다. 그는 나라가 기울어가는 순간에도 끝까지 싸운 장수였고, 후대에 ‘충절’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가 쓰러진 황산벌의 땅 위로, 지금도 바람이 분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는 계백의 마지막 외침이 남아 있다. “백제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