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처럼 흘러간 내물왕의 시간
대릉원의 고분들 위로 스치는 바람은 천오백 년을 뛰어넘어 여전히 같은 길을 돈다. 먼지 한 톨까지도 세월이 묻어 있는 경주의 땅을 밟으며 사람들은 잊힌 이름들을 떠올린다. 알영과 혁거세의 신화처럼 빛나진 않지만, 신라가 작은 나라에서 왕국으로 나아가던 그 갈림길에 서 있던 한 사람, 내물왕을 떠올려 본다.
내물 마립간. 신라의 17대 왕.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등장한 첫 번째 왕. 그 전까지는 모두 “이사금”이었다. 왕이라기보다 대중의 추대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 그러나 내물왕은 그저 백성들의 손에 의해 세워진 지도자가 아니었다. 신라는 그의 시대를 기점으로 왕의 권력이 확립되었고,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춘 나라가 되었다. 그는 바람처럼 왔다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강물처럼 깊고 넓었다.
철기 문명을 확립한 왕
내물왕이 즉위한 4세기 후반, 신라는 아직 약소국에 불과했다.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강력한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남쪽에는 왜(倭)의 세력이 꿈틀댔다. 철이 있었지만 철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했다. 농기구와 무기가 여전히 덜 정교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수세에 몰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내물왕은 신라가 강해지려면 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가야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가야를 넘어서기 위해 철기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덕분에 신라의 무기는 더욱 단단해졌고, 전차와 갑옷이 개선되었다. 그 결과 신라는 주변국들과의 전투에서 밀리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전쟁이 나면 늘 먼저 불타던 마을들이 이제는 철제 무기와 갑옷을 두른 군대에 의해 보호받기 시작했다. 내물왕의 신라는 그렇게 점차 강한 국가로 변모해갔다.
왕권을 확립한 지도자
내물왕 이전까지 신라의 왕들은 귀족들의 합의에 의해 선출되었다. 물론 왕이라 해도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내물왕은 달랐다. 그는 김씨 왕권을 확고히 하며, 후대까지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틀을 마련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면서부터 왕권은 세습되기 시작했고, 이후 신라는 김씨 왕조로 이어지는 나라가 되었다.
그는 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구려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시 신라는 백제와 왜의 침입을 빈번하게 받았고, 이를 막기 위해서는 강한 동맹이 필요했다. 내물왕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고, 고구려는 신라를 돕기 위해 군사를 파견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비교적 안정적인 방어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내물왕이 남긴 유물과 흔적
역사는 기록이 남지 않으면 쉽게 사라지지만, 내물왕의 흔적은 유물로 남아 있다. 경주에서 발견된 유물들 중 그의 시대를 증명하는 것들이 많다. 특히 신라의 철기 문화와 관련된 유물들, 그리고 왕권 강화를 상징하는 금관과 갑옷이 그를 떠올리게 한다.
내물왕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물로는 ‘금동 관모’가 있다. 신라의 금관과 비슷한 형태지만, 좀 더 단순하고 원형적인 디자인을 띠고 있다. 이 관모는 왕권이 점차 강화되던 시기의 유물로 평가받으며, 내물왕이 왕권을 공고히 다지는 과정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내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경주의 큰 고분들 중 일부에서도 철제 유물과 말갖춤(기마 장비)이 출토되었다. 이는 신라가 단순한 소국에서 기마병을 갖춘 군사국가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흘러간 강물, 남은 이름
내물왕은 한 시대를 열었다. 그의 시대 이전과 이후는 분명히 달랐다. 왕은 더 이상 귀족들에 의해 선출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가 되었다. 철기는 더 이상 부족한 자원이 아니라, 신라를 지키고 성장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내물왕이 마련한 이 토대 위에서, 후대의 왕들은 신라를 삼국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만들었다.
그의 무덤은 바람 속에 묻혀 있다. 그를 직접 본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그러나 신라의 황금빛 유물들과 철제 무기, 그리고 아직도 대릉원 언덕을 굽이치는 바람 속에는 그가 남긴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강물처럼 흘러간 내물왕의 시간. 그 물결이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