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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불법(佛法) 위에 세운 나라, 신라 법흥왕

 

불법(佛法) 위에 세운 나라, 법흥왕

 

그 옛날 신라 땅을 스쳐 가던 바람이 지금도 대릉원의 무덤들을 넘고, 황룡사터를 휘돌아 흐른다. 그 바람 속에는 무수한 이름들이 섞여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 시대를 연 이름이 있다. 법흥왕(法興王). 신라를 나라답게 만들고, 불교를 통해 백성을 하나로 묶었던 왕. 왕권을 다지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결국 신라를 삼국통일로 향하는 길목에 세운 자. 그가 없었다면 신라는 그저 작은 나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율령을 반포하다, 신라를 법으로 세우다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던 시기, 신라는 여전히 부족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왕이 있었지만 귀족들의 권한이 강했고, 나라의 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법이 있어야 했고, 그 법을 다스리는 왕이 있어야 했다.
그는 ‘율령’을 반포했다. 신라 최초의 국가적 법률이었다. 이제 나라에는 규칙이 생겼고, 모든 것이 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의 권력도, 신하들의 권한도, 백성들의 삶도 법 안에서 이루어졌다.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은 단순한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가 이제 진정한 국가로 거듭났다는 선언이었다.

 

불법을 받아들이고, 신라를 하나로 묶다
그러나 법만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다.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불교였다.
법흥왕은 신라에 불교를 공인했다. 당시 신라에서는 여전히 토착 신앙이 강했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불교가 나라를 하나로 만들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왕권을 신성하게 만들었다.
불교 공인의 상징으로 법흥왕은 이차돈(異次頓)을 희생시켰다. 불교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피가 필요했다. 이차돈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신라 땅에 불교를 심었다. 전해지는 이야기 속에서 그의 피는 하얗게 솟구쳤고, 그 순간 신라 사람들은 깨달았다. 불교는 신라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법흥왕은 더 이상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신이 선택한 왕이 되었다.

 

금관과 병장기, 왕권의 상징들
법흥왕 시대는 단순히 법과 종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 왕권을 확립했다. 이를 증명하는 유물들이 남아 있다.
그의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가 ‘금관’이다. 신라의 금관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권의 상징이었다. 법흥왕은 신라의 왕이 단순한 부족장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화려한 금관을 쓰고, 왕의 위엄을 강조했다.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신라의 금관들 중 일부는 그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법흥왕 시대의 철제 무기들이 출토되었다. 법흥왕은 단순한 법과 종교의 왕이 아니라, 군사적 기반을 다진 왕이었다. 신라군은 철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창과 칼은 백제와 고구려의 군대와 맞설 힘이 되어갔다. 그는 군사력을 바탕으로 금관가야를 정복했고, 신라의 국력을 크게 확장시켰다.

 

신라를 왕의 나라로 만들다
법흥왕 이전의 신라는 귀족들이 중심이었고, 왕은 그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법흥왕은 달랐다. 그는 왕권을 강화했고, 왕이 나라를 이끄는 체제를 만들었다. 법이 있었고, 종교가 있었으며, 군대가 있었다. 이제 신라는 부족국가가 아니라, 왕이 다스리는 국가였다.
그가 세운 체제는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에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은 이 기반 위에서 영토를 확장했고, 신라는 더 강한 나라로 나아갔다.

 

흘러간 시간, 남아 있는 이야기
법흥왕은 먼 옛날의 왕이다. 그의 무덤은 바람 속에 묻혀 있고, 그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가 만든 신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불교는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있고, 그의 이름은 경주의 비석들 속에 남아 있다.
그가 없었다면 신라는 어땠을까. 그가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가 율령을 반포하지 않았다면, 그가 왕권을 강화하지 않았다면. 신라는 여전히 작은 나라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그 길 위로 신라는 걸어갔다. 바람은 여전히 경주의 돌담을 넘고, 황룡사의 흔적 위로 흐른다. 그 바람 속에서 우리는 법흥왕의 이름을 다시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