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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흔들리는 왕좌, 신라 혜공왕

 

흔들리는 왕좌, 혜공왕

 

신라 제36대 왕, 혜공왕.  왕이라 불렸으나 왕이 아니었다. 왕좌에 앉았으나 권력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신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시대는 어지러웠고, 권력은 피를 부르며 흔들렸다. 그는 그 모든 격랑 속에서 오직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뜻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힘이 없었고, 그를 지켜줄 이도 없었다. 끝내, 그는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한 번이라도 온전히 신라의 왕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어린 왕, 왕좌에 오르다
혜공왕은 어렸을 때 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경덕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왕좌는 단숨에 그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자리가 아니었다.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들이 힘을 키우던 시대였다. 어린 왕이 즉위하자, 실권은 왕이 아니라 귀족들이 가졌다. 신라는 이제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왕은 허울뿐이었고, 진짜 권력은 궁궐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혜공왕은 왕이었지만,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나라의 정책은 귀족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고, 왕이 아닌 대귀족들이 나라를 움직였다. 신라는 혼란스러웠고, 왕권은 점점 더 흔들렸다. 그는 그것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성장했을 때, 신라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왕권이 흔들리다
혜공왕이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왕권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은 이미 신라를 자신들의 나라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몇 차례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의 뜻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틈을 노려 반란이 일어났다.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들이 수도까지 번졌고, 왕위에 대한 도전도 끊이지 않았다. 결국 780년,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다. 대아찬 김지정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왔다. 혜공왕은 끝까지 버텼지만, 결국 왕좌에서 끌어내려졌다. 그날, 그는 궁궐에서 살해당했다. 신라의 왕이, 신라의 수도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가 남긴 것, 그리고 무너진 왕조
혜공왕은 왕이었지만, 그가 남긴 것은 거의 없다. 그의 치세 동안 신라는 계속해서 쇠퇴했다. 그는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것을 밀어붙일 힘이 없었다. 그의 시대는 왕권이 몰락하는 시대였고, 신라가 서서히 무너지는 시대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를 상징하는 몇 가지 흔적은 남아 있다. 경주에서 발견된 몇몇 불교 유물들은 그의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불교는 여전히 강했고, 사찰들은 여전히 세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신라를 지탱할 수는 없었다. 혜공왕이 죽은 후, 신라는 더욱 혼란에 빠졌고, 왕위는 더욱 자주 바뀌었다.
혜공왕의 무덤은 경주의 언덕 어딘가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왕이었고, 스스로 힘을 가질 수 없었던 왕이었다. 신라는 그가 죽은 후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결국 후삼국 시대를 향해 내달리게 되었다.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바람이 불었다. 혜공왕이 숨을 거두던 그날도, 바람은 궁궐을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는 왕이었지만, 왕이 아니었다. 그의 시대는 신라의 끝자락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는 그 시대 속에서 무력하게 쓰러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신라가 더 이상 예전의 신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바람은 분다. 경주의 돌담을 지나며, 무너진 왕조의 그림자를 스치며. 그 바람 속에서 혜공왕의 이름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 이름은 잊혀졌지만, 그의 시대가 남긴 상처는 아직도 신라의 역사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