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자리는 높았으나, 세상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왕이 된 것은 단순한 운명이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낡아 있었다. 바람이 불고,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서양의 배가 바다를 가르고, 일본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중국은 더 이상 조선을 지켜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어린 소년이 왕위에 올랐다.
1863년, 그는 조선의 26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어린 왕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섭정, 개혁과 쇄국
고종이 왕이 되었을 때, 실질적으로 정치를 움직인 사람은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었다. 대원군은 강한 사람이었다. 오랜 세월을 기다렸고, 기회가 오자마자 움직였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세도정치의 타파였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외척 세력의 권력을 제거했다.
왕권을 강화하고, 신하들이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게 했다.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고통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단순히 내부 개혁만으로는 조선을 살릴 수 없었다. 바깥의 세상도 변하고 있었다. 서양의 배들이 조선의 해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원군은 그것을 거부했다.
쇄국정책(鎖國政策), 조선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그의 선택이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자(병인양요), 이를 격퇴했다.
1871년, 미국 함대가 조선을 공격했을 때(신미양요), 이를 저지했다.
전국의 서원을 대대적으로 정리하여, 사대부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나라는 잠시나마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문제들이 떠올랐다.
서양의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조선은 더욱 낙후될 것이었다. 쇄국은 당장의 안전을 보장할 수는 있어도, 조선의 미래를 열어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왕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 고종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고종의 친정, 개항과 근대화
고종은 단순한 꼭두각시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직접 나라를 다스리고 싶었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그가 왕으로서 첫 번째 내린 큰 결정은 개항(開港)이었다.
1876년,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했다.
조선은 부산, 원산, 인천 등 여러 항구를 개방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불평등한 조약이었고, 조선은 일본에게 점점 더 휘둘리기 시작했다.
고종은 개항을 통해 조선을 근대화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일본의 침략이 더욱 쉬워졌다.
그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1883년, 기기창(機器廠)을 세워 서양식 무기를 제조했다.
1884년, 우정국(郵政局)을 설립하여 조선의 우편 제도를 정비했다.
1885년, 전등(電燈)을 처음으로 경복궁에 설치했다.
그러나 근대화의 길은 쉽지 않았다. 조선은 아직 낡은 사상과 제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세의 압박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위기의 연속, 조선을 삼키는 외세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서 흔들렸다. 고종은 어느 한 나라에 기대지 않고 균형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위기를 불러왔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조선군이 개혁 과정에서 차별을 받자 반란을 일으켰고, 청나라가 이를 진압했다. 조선은 더욱 청나라에 의존하게 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생했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켜 근대화를 시도했으나, 3일 만에 실패했다. 일본과 청나라의 개입이 더욱 심해졌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터졌다. 백성들은 부패한 조정을 비판하며 개혁을 요구했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탄압했다. 결국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하며 전쟁(청일전쟁)이 벌어졌다.
고종은 점점 더 외부의 압력 속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조선은 이제 독립된 나라가 아니라, 강대국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다
1897년, 그는 결단을 내렸다. 조선이라는 이름으로는 더 이상 나라를 지킬 수 없었다.
그는 황제가 되기로 했다.
조선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고, 황제국으로 격상시켰다.
독립적인 국가임을 선포하며,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근대화를 더욱 추진하며, 서양식 군대와 행정 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이미 너무 늦은 변화였다. 일본은 조선을 장악할 준비를 마쳤고, 대한제국은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겼다.
고종은 끝까지 저항했다. 그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海牙特使)를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은 그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1907년, 그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했다.
마지막 순간
왕이었으나, 왕이 아니었다.
고종은 이후 덕수궁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조용하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나라를 되찾을 방법을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1919년, 그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백성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그가 남긴 것들
고종은 조선을 지키려 했으나, 결국 조선을 지키지 못한 왕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들은 있었다.
대한제국: 비록 짧았지만, 자주독립을 위한 노력의 상징이었다.
근대화 개혁: 기기창, 전등, 우정국 등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
헤이그 특사: 조선을 세계에 알리려 했던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끝까지 조선을 지키려 한 마지막 왕이었다. 그리고 그의 꿈은, 이후 독립운동가들의 손에 의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