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마지막 칼날, 계백 황산벌의 대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먼지와 피가 섞인 전장 속에서 한 장수가 마지막까지 칼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백제의 충신이었고,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싸운 장수였다. 이름은 계백. 그의 칼은 백제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지만, 그의 충의는 영원히 기억되었다. 혼돈의 시대, 백제의 장군이 되다 660년, 백제는 기로에 서 있었다. 의자왕은 신라를 압박하며 과거 백제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으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은 이제 곧 공격받을 운명이었다. 나라를 지킬 최후의 전선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전선의 중심에 계백이 있었다. 그는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백제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고, 백제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의자왕은 그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황산벌을 사수하라. 황산벌 전투, 백제의 운명을 건 싸움 계백은 5천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황산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적은 너무나도 강했다. 신라군은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대군이었다. 계백은 전세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처단했다. “
백제의 마지막 불꽃, 의자왕 한강에서 시작된 강국의 기운이 점차 약해져 갔다. 바람은 거세게 불었고, 전쟁의 불길은 다시금 백제를 집어삼키려 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그 모든 격랑 속에서 왕좌에 올랐다. 그는 강한 왕이었고, 야망을 품은 자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몸부림과 함께, 몰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강한 왕의 등장 의자왕은 641년, 백제의 31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 무왕은 불교를 통해 백제를 하나로 묶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의자왕은 무너져 가는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즉위 초반,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다지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신라였다. 한때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견제하는 적이 되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백제는 이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의자왕은 먼저 신라를 공격하며 전쟁의 흐름을 백제 쪽으로 돌리려 했다. 신라를 압박하다 642년, 의자왕은 신라의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의
미륵의 나라를 꿈꾼 왕, 백제 무왕 백제의 대지가 붉게 물들었다. 서쪽으로 해가 저물어 가고, 왕궁의 지붕 너머로 미륵사의 황금빛 불탑이 빛났다. 한 사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칼을 들었던 왕이었지만, 동시에 불법을 세우고 백제를 부흥시키려 했던 자였다. 그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꿈꾼 개혁자였다. 그의 이름은 무왕이었다. 강변의 아이, 왕이 되다 무왕은 기이한 출생설화로 전해진다. ‘서동’이라는 이름으로 강가에서 태어나 자랐고, 농사를 짓던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농부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가 왕좌에 오른 순간, 백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600년, 그는 백제의 왕이 되었다. 그의 즉위는 백제의 운명을 다시 한 번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성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후, 백제는 점점 쇠약해졌다. 그러나 무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전쟁과 확장,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다 무왕의 시대, 한반도는 전쟁의 시대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는 여전히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백제는 두 나라의 위협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사비에 새긴 꿈, 백제 성왕 강이 흐르는 곳에 도시가 있었다. 벽돌이 쌓이고,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도시는 더 이상 웅진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한 왕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는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개혁자였고, 사비라는 새로운 땅에서 미래를 설계한 개척자였다. 그의 이름은 성왕이었다. 웅진을 떠나 사비로 523년, 성왕이 왕좌에 올랐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무령왕이 닦아 놓은 안정적인 백제를 유지하는 길,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변화하는 길.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538년,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겼다. 웅진은 방어하기 좋은 곳이었지만, 더 이상 백제의 미래를 담을 그릇이 아니었다. 한강을 잃은 백제에게는 새로운 중심지가 필요했다. 사비는 강과 가까웠고, 교역을 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성왕은 이곳에서 다시 한강을 향한 꿈을 꾸었다. 그는 단순히 수도를 옮긴 것이 아니었다. 사비는 새롭게 계획된 도시였다. 궁궐을 짓고, 도로를 정비하고, 나라의 틀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그는 백제의 이름마저 바꾸었
강을 넘어 부흥을 꿈꾼 왕, 무령왕 바람이 잔잔하게 불었다. 금강의 물줄기는 한없이 흐르고, 그 강변에는 웅진성이 우뚝 서 있었다. 백제의 역사는 폭풍 속에서 흔들렸지만, 한 왕이 그 바람을 가르고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그는 강한 자였다.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백제를 다시 세운 개혁자였다. 그의 이름은 무령왕이었다. 다시 일어선 백제 501년, 동성왕이 귀족들의 손에 암살당했다. 왕권은 흔들리고, 백제는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 속에서 무령왕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단순한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가 왕이 된 순간부터, 백제는 다시 강한 나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의 시대, 백제는 더 이상 한강을 차지한 강대국이 아니었다.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패배하며 한성을 빼앗겼고,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백제는 방어에 급급했다. 그러나 무령왕은 웅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왕권을 강화하다 무령왕은 먼저 내부의 혼란을 정리했다. 귀족 세력의 반란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귀족들의 힘을 완전히 짓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균형을
찬란한 동맹, 백제의 개척자 동성왕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한강 위로 저녁노을이 번져갔다. 강변에 선 한 사내는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저 강은 고구려의 땅을 지나 중국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저 너머에는 신라가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백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강을 건너야 했다. 그는 백제의 왕, 동성왕이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다 백제는 한때 강성한 나라였다. 근초고왕이 전성기를 열었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475년, 한성을 지키지 못한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왕과 수도를 잃었다. 개로왕이 전사했고, 수도는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옮겨졌다. 나라의 기둥이 흔들렸고, 백제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 479년 동성왕이 즉위했다. 왕좌에 오른 순간부터 그는 결심했다. 백제를 다시 세울 것이라고. 더 이상 패배하지 않겠다고. 백제는 다시 한 번 한반도의 강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신라와 손을 잡다 동성왕은 생각했다. 백제가 홀로 강해질 수는 없다. 힘을 키우려면 동맹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맹 상대
바다를 넘어선 왕, 근초고왕 한강의 물줄기는 쉼 없이 흘러갔다. 강변에 선 한 사내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강했다. 그는 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저 너머,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있었다. 백제의 왕, 근초고왕. 그의 야망은 한반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넘어 더 넓은 세상을 품으려 했다. 강한 왕이 되다 근초고왕은 346년, 백제의 왕좌에 올랐다. 그의 즉위는 단순한 왕의 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제가 진정한 강국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의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힘을 키우는 성장기였다. 그러나 근초고왕은 더 이상 성장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강한 왕이 되어,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했다.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며 귀족들의 힘을 조율했고, 백성들을 보호하며 나라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정치가였고, 전략가였다.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자였다. 고구려를 무너뜨리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오랜 시간 대립해 왔다. 근초고왕은 이를 끝내기로 했다. 그는 먼저 군사를 정비하고, 국력을 다졌다. 그리고 마침내 371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으로 진격한
강을 건넌 자, 백제의 시조 온조왕 한강의 물줄기는 거세게 흘렀다. 계절이 바뀌어도 멈추지 않았고, 세월이 지나도 그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저 강을 건넌 자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결심을 했고, 먼 길을 떠났다. 그가 남긴 발자국 위에 도성이 세워졌고, 그 도성은 나라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온조왕. 백제의 시조였다.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운 뒤, 그의 뒤를 이을 자리를 두고 혼란이 일었다. 주몽의 아들들 중 비류와 온조는 왕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형제는 사람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낯선 땅이었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향했다. 바닷가에 자리한 땅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땅은 척박했고, 강한 바람이 불었다. 비류는 끝내 그곳에서 버티지 못하고 좌절했다. 반면, 온조는 한강 유역을 선택했다.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강이 흐르는 땅이었다. 농사도 지을 수 있었고, 성을 쌓기에도 좋았다. 그는 그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고 나라를 세웠다. 나라의 이름은 백제(百濟). 사람들을 널리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나라를 세우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