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거나 먹는다고, 다 잘 먹는다고, 뭐든 괜찮다고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아무거나'는 사실 하나하나 골라 낸 것들의 모음이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고를 때도,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고를 때도, 우리는 어딘가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무수한 것들을 머릿속에 펼쳐놓고 그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렇게 우리는 선택이라는 행위를 통해 나를 구성하고 있다.
과거에는 '전문가'라는 말이 존중받았다. 한 가지 길을 꾸준히 걸어간 사람, 한 분야에서 깊이를 더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 다양한 관심사와 취향을 가진 이들이 등장했다. 바로 옴니보어다. 뭐든지 먹는 사람, 뭐든지 받아들이는 사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스스로의 질서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그들은 오늘은 힙합을 듣다가 내일은 클래식에 빠진다. 점심은 비건 샐러드를 먹고 저녁에는 삼겹살을 구운다. 유튜브에서는 명상 채널을 구독하면서 틱톡에서는 밈 영상을 본다. 그들이 이리저리 흔들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고정된 중심 없이도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는 유연함이 그들의 강점이다.
옴니보어는 다채로움 속에서 스스로의 질서를 찾는다. 이것은 단순히 '잡식'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들은 의미 없는 수용이 아닌 선별적 수용을 한다. 다양하게 시도하지만, 모든 것을 가볍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에게 맞는 것,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남긴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릴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그렇게 축적된 수많은 층위들이 그 사람의 깊이가 되고, 또 그만의 고유한 감도가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너는 도대체 뭘 좋아하느냐고, 왜 이렇게 이것저것 다 하느냐고. 그때마다 옴니보어는 말한다. 나는 하나의 이름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나는 다르다고, 나는 그저 내가 좋고 내 몸에 맞는 것을 택해왔을 뿐이라고. 좋아하는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아서 욕심이 많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욕심이 아니다. 살아 있는 감각이다. 눈을 뜨면 무엇이든 볼 수 있고, 귀를 열면 어디서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각 말이다.
이 감각은 수동적인 흡수가 아니다. 적극적인 채집이다. 더 좋은 것을 찾기 위한 탐색이고, 더 잘 어울리는 무언가를 위한 실험이다. 옴니보어는 흐트러져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맥락 속에 있다. 혼란 속에서도 흐름이 있고, 중첩된 취향 속에서도 명확한 선호가 있다. 그들의 삶은 정리되지 않지만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제는 누구도 자신을 하나의 단어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너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저 다양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점점 많아진다. 옴니보어는 바로 그런 이들이다. 유연하고, 열려 있고, 자유로운 이들이다. 그들은 정답을 찾기보다 방향을 찾는다. 틀리지 않으려 애쓰기보다는 나다운 것을 향해 움직인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단일한 기준이나 하나의 정답으로 설명되지 않는 시대다. 그래서 옴니보어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현실적인 인간형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정보와 선택지 속에서 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방식, 그 방식의 이름이 바로 옴니보어다. 혼란의 시대에 혼란을 기꺼이 껴안는 사람. 그것이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새로운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