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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한담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화해의 길잡이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화해의 길잡이

 

김수환 추기경, 그 이름은 한국 현대사에서 사랑과 희생, 그리고 화해를 상징하는 이정표 같은 존재로 기억된다. 그는 단순히 천주교의 지도자를 넘어, 우리 사회가 가장 어두운 시기를 겪을 때 빛을 비추었던 등불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단순한 종교인의 길을 넘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실천으로 보여준 여정이었다. 특히 그의 대표적인 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울림을 주었다. 이 말은 단순한 교훈을 넘어, 그의 신앙과 삶의 방식이 담긴 진리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이들을 품었고,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독재정권 아래에서도 두려움 없이 진실을 말하며 정의를 외쳤고, 민주화 운동이 활활 타오르던 시대에는 종교적 권위를 넘어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는 상징적 존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단순히 ‘투사’의 이미지를 넘어서, 사랑과 온유함이 가득한 한 인간의 따스함을 볼 수 있었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을 돌아보면 그의 교육과 신앙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는 1940년대 서울의 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중학교를 거쳐 1948년 서울 가톨릭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로마의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신학과 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며 1954년에 학위를 받았다. 그의 학문적 토대는 사제로 서품된 1957년 이후 다양한 교구에서 사목 활동을 이끄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968년, 그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며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는 인사말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의 원칙을 밝혔다. 이후 1970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승품되어 명동 대성당에서 착좌식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교회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이듬해인 1971년, 그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면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로서 그의 역할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단순히 교회의 울타리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인권과 평화, 사회 정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의 발언과 행동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민주화 운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기에는 권력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과 정의를 외쳤다. 동시에 그는 화해와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을 통한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했다. 그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한반도의 갈등과 분열을 해결하기 위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추기경의 생애는 겸손과 단순함으로 가득 찼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장례식을 소박하게 치러달라고 당부하며, 마지막까지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본받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김수환 추기경은 떠났지만, 그의 유산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의 말과 행동은 오늘날에도 우리 사회의 도덕적 나침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랑, 용서, 화해, 그리고 나눔의 가치를 몸소 실천했던 그의 삶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의 생애를 돌아보며,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그의 가르침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 우리는 그의 사랑의 메시지를 어떻게 이어가고 있는가?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에게 ‘사랑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었다.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