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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고려 태조 왕건(王建), 한 사내가 이룬 나라

 

고려 태조 왕건(王建) – 한 사내가 이룬 나라

 

세상에는 이름만으로도 시대를 상징하는 자들이 있다. 왕건(王建), 그 또한 그러한 이름이었다. 신라의 기운이 다하고, 후삼국이 어지럽게 엉켜 있던 시절, 그는 어둠을 뚫고 한 시대를 연 사내였다.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고, 그저 운이 좋은 자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세우고, 그 왕조를 천 년 동안 이어지게 한 사내였다.

 

무너지는 시대, 떠오르는 별
왕건은 877년, 고려 개국 이전의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태어났다. 당시 신라는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세력가들이 스스로를 호족(豪族)이라 칭하며 땅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신라의 힘은 경주의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고, 나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런 틈을 타 후백제의 견훤(甄萱), 태봉의 궁예(弓裔) 등이 일어나 스스로 왕을 칭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왕건은 본래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 출신으로, 아버지 왕륭(王隆)은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단순한 상인의 자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궁예가 태봉을 세우고 세력을 키워갈 무렵, 왕건은 그의 휘하에서 뛰어난 용맹과 지략을 보이며 점차 중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궁예는 점차 포악해졌다.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며 백성들을 탄압했고, 신하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다. 왕건은 이미 그 한계를 보았다. 백성은 궁예를 두려워할 뿐 사랑하지 않았다. 그가 오래 버틸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마침내 918년, 왕건은 신하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高麗)를 건국했다. 그는 더 이상 한 장수가 아니라, 한 나라의 태조(太祖)가 되었다.

 

고려, 새로운 시대의 시작
왕건이 세운 고려는 단순히 새로운 나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무력뿐만 아니라 유화책도 함께 사용했다.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 신검(神劍)에게 쫓겨나 왕건에게 귀부하자, 그는 견훤을 극진히 대접하며 견훤이 가지고 있던 후백제의 내부 정보를 활용했다. 결국, 936년 신검을 물리치고 고려는 완전한 통일을 이루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敬順王)도 스스로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며 고려의 품에 안겼다.

 

그러나 왕건이 단순한 정복자였다면, 고려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호족들을 포용하고, 혼인 정책을 활용하여 각 지역 세력들과 혈연관계를 맺었다. 또한, 후삼국으로 나뉘어 있던 민심을 통합하기 위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다. 이는 고려 왕실이 지켜야 할 기본 이념이었고, 그 핵심은 불교를 숭상하고,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호족들과의 협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왕건이 남긴 유산
왕건은 단순히 나라를 세운 왕이 아니라, 후대까지 영향을 미친 개국 군주였다. 그가 남긴 유물과 업적들은 고려 천 년 역사 속에서도 깊은 흔적을 남겼다.

 

훈요십조(訓要十條)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남긴 10가지 교훈으로, 고려 왕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특히 불교를 숭상할 것과 개경(송악)을 중심으로 나라를 운영할 것을 강조했다.

 

팔관회(八關會)와 연등회(燃燈會)의 부활
고려의 국교로 불교를 확립하면서, 불교 행사를 국가적 의례로 삼았다. 팔관회와 연등회는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개경(開京)과 서경(西京) 중시
수도를 개경으로 정하고, 서경(지금의 평양)을 부도(副都)로 삼았다. 이는 풍수지리 사상을 반영한 것이었으며, 국토의 균형 발전을 고려한 것이었다.

 

고려청자(高麗靑瓷)의 시작
왕건 대부터 고려는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며, 청자의 제작 기술을 받아들였다. 이후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성장하였다.

 

왕건릉(王建陵)
지금의 개성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고려 왕릉 양식의 기초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남아 있어 그의 위엄을 보여준다.

 

그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
943년, 왕건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생애 동안 한 나라를 세웠고, 한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고려의 역사는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남긴 유산은 이후 고려 왕조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강조했던 호족과의 협력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왕권과의 갈등을 낳았다. 그의 아들 혜종(惠宗)은 왕권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왕건의 손자인 광종(光宗)이 철혈정책으로 호족을 숙청하며 고려 왕권을 확립하게 된다.

 

그러나 왕건이 세운 기본 틀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려는 조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500년 넘게 한반도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유훈과 사상은 오랫동안 고려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왕건, 그는 누구였는가?
왕건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가이자, 전략가였고, 동시에 한 나라를 만든 개국 군주였다. 그는 피로 나라를 세웠으나, 피만으로 나라를 운영하지 않았다. 포용과 지혜, 그리고 현실 감각으로 그는 고려를 천 년 왕조로 만들었다.

 

오늘날까지도 개성의 왕건릉은 남아 있고, 그의 이름은 여전히 한국사 속에서 빛나고 있다. 왕건, 그는 한 시대를 연 개국 군주였으며, 단순한 왕이 아니라 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거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