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고려의 기틀을 세우다
고려는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났다고 곧바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왕건이 세운 나라였고, 광종이 왕권을 다졌지만, 아직 고려는 하나가 아니었다.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움직이는 법이 있어야 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야 했다.
성종. 그는 고려의 여덟 번째 왕이었다. 나라는 왕이었지만, 아직 체제가 아니었다. 광종이 칼로 고려를 다듬었다면, 성종은 그 위에 틀을 만들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세웠고, 고려가 진짜 국가가 되도록 했다.
유교 정치, 새로운 질서를 만들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왕건도, 광종도 불교를 믿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절이 많았고, 스님들이 힘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라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성종은 유교를 택했다. 불교는 백성을 다독이기에 좋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부족했다. 유교는 법과 질서를 강조했다. 신하는 왕을 섬기고, 백성은 그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성종이 원한 세상이었다.
그는 전국에 유교 교육을 퍼뜨렸다.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지방에도 학교를 만들었다. 신하들은 책을 읽고, 유학을 공부해야 했다. 과거제를 통해 인재를 뽑고, 유교적 가치를 행정의 중심에 두었다.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불교가 고려를 지탱해 왔는데, 왕이 유교를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했다. 그러나 성종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제도였다. 그는 고려가 제도 위에서 굴러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2목 설치, 지방을 다스리다
고려는 넓었다. 그러나 넓다는 것은 곧 혼란이라는 뜻이었다. 왕의 힘이 미치는 곳은 개경뿐이었고, 지방은 여전히 호족들의 세상이었다. 성종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왕의 힘이 모든 곳에 있어야 했다.
그는 12목(十二牧)을 설치했다. 고려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방을 직접 통제하려 했다. 12곳에 지방관을 파견하고, 지방 백성들은 이제 호족이 아니라 왕의 관리를 섬겨야 했다.
지방에는 교육도 시작되었다. 백성들이 배워야 나라가 안정된다고 믿었다. 그들을 가르치고, 법을 세우고, 세금을 걷었다. 고려가 하나의 나라가 되어 가고 있었다.
호족들은 반발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자기 땅을 다스려 왔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성종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나라가 단순한 땅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체제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연등회와 팔관회 폐지, 불교를 견제하다
광종은 불교를 정치의 중심에 두었다. 불교는 왕을 지지했고, 왕은 불교를 보호했다. 그러나 성종은 그것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고려는 왕이 다스리는 나라지, 절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는 과감히 결정했다. 왕실이 주도하던 불교 행사인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폐지했다. 백성들이 종교를 믿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이 국가 운영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그의 결정은 논란이 되었다. 불교계에서는 반발했다. 그러나 성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왕권이 신앙이 아니라 법과 제도 위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고려는 이제 체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거란의 침입, 고려의 힘을 시험하다
나라가 정비되어 갈 무렵, 북쪽에서 위기가 닥쳤다. 거란이었다.
거란은 강했다. 요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성종은 외교를 생각했다. 그는 송나라와 친교를 맺고, 거란과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거란은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고려가 송나라를 돕는다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것이었다.
993년, 거란이 고려를 침입했다. 서희가 나섰다. 그는 전쟁이 아닌 외교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거란 장군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고려는 스스로 강한 나라라 했다. 신라는 스스로를 낮추어 살아남았지만, 고려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했다. 서희는 담대했고, 논리는 명확했다.
결과는 고려의 승리였다. 싸우지 않고도 국경선을 확장했다. 압록강까지 고려의 땅이 되었다. 성종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고려는 약하지 않았다.
성종이 남긴 것들
성종은 전쟁의 왕이 아니었다. 그는 칼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전쟁보다 강력했다. 그는 고려를 단순한 왕국에서 국가로 만들었다.
그가 남긴 것은 제도였다.
그가 남긴 것은 질서였다.
그가 남긴 것은 고려의 기틀이었다.
그의 시대에 만들어진 국자감은 후대까지 이어졌다. 유교는 고려의 근본이 되었고, 조선조차 그것을 계승했다.
그가 다스린 15년 동안 고려는 바뀌었다. 지방은 체계적으로 운영되었고, 불교는 절제되었으며, 유교적 질서는 뿌리내렸다.
그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 곳에 남아 있었다.
국자감. 고려 최초의 교육기관.
12목 제도. 지방 통치의 시작.
서희의 외교. 거란을 막아낸 담판.
1009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난 자리에는 새로운 고려가 남았다. 단순한 왕국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였다.
우리는 성종을 전쟁의 영웅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는 싸우지 않았다. 대신 그는 다스렸다.
그의 손길은 나라 곳곳에 닿았다. 법과 제도를 세웠고, 고려를 고려답게 만들었다.
성종. 그는 칼 없는 개혁자였다. 그리고 고려의 틀을 만든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