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을 넘어 부흥을 꿈꾼 왕, 무령왕 바람이 잔잔하게 불었다. 금강의 물줄기는 한없이 흐르고, 그 강변에는 웅진성이 우뚝 서 있었다. 백제의 역사는 폭풍 속에서 흔들렸지만, 한 왕이 그 바람을 가르고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그는 강한 자였다.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백제를 다시 세운 개혁자였다. 그의 이름은 무령왕이었다. 다시 일어선 백제 501년, 동성왕이 귀족들의 손에 암살당했다. 왕권은 흔들리고, 백제는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 속에서 무령왕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단순한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가 왕이 된 순간부터, 백제는 다시 강한 나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의 시대, 백제는 더 이상 한강을 차지한 강대국이 아니었다.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패배하며 한성을 빼앗겼고,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백제는 방어에 급급했다. 그러나 무령왕은 웅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왕권을 강화하다 무령왕은 먼저 내부의 혼란을 정리했다. 귀족 세력의 반란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귀족들의 힘을 완전히 짓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균형을
찬란한 동맹, 백제의 개척자 동성왕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한강 위로 저녁노을이 번져갔다. 강변에 선 한 사내는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저 강은 고구려의 땅을 지나 중국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저 너머에는 신라가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백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강을 건너야 했다. 그는 백제의 왕, 동성왕이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다 백제는 한때 강성한 나라였다. 근초고왕이 전성기를 열었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475년, 한성을 지키지 못한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왕과 수도를 잃었다. 개로왕이 전사했고, 수도는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옮겨졌다. 나라의 기둥이 흔들렸고, 백제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 479년 동성왕이 즉위했다. 왕좌에 오른 순간부터 그는 결심했다. 백제를 다시 세울 것이라고. 더 이상 패배하지 않겠다고. 백제는 다시 한 번 한반도의 강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신라와 손을 잡다 동성왕은 생각했다. 백제가 홀로 강해질 수는 없다. 힘을 키우려면 동맹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맹 상대
빛을 품은 왕, 침류왕 한강 위로 노을이 번져갔다. 강변에는 바람이 불고, 그 속에서 한 사내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검을 들고 수많은 전쟁을 치러온 왕들이 아니었다. 그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믿음이었고, 그의 전장은 들판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이었다. 그는 백제의 왕, 침류왕이었다. 그리고 그는 빛을 품은 왕이었다. 왕좌에 오르다 375년,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 백제는 이제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침류왕이 즉위했다. 그가 왕이 되던 순간, 백제는 여전히 강국이었고, 한강을 중심으로 번영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단순히 칼로 나라를 지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침류왕은 그 힘을 깨닫고 있었다. 새로운 길, 불교를 받아들이다 침류왕이 왕이 되던 시대, 백제는 교역을 통해 중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다. 중국의 문화는 강했고, 그 안에는 새로운 사상이 있었다. 바로 불교였다. 한나라에서 시작되어 서역을 거쳐 전해진 이 사상은, 이미 중국에서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백제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침류왕은 이 새로운 사상이 백제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바다를 넘어선 왕, 근초고왕 한강의 물줄기는 쉼 없이 흘러갔다. 강변에 선 한 사내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강했다. 그는 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저 너머,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있었다. 백제의 왕, 근초고왕. 그의 야망은 한반도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바다를 넘어 더 넓은 세상을 품으려 했다. 강한 왕이 되다 근초고왕은 346년, 백제의 왕좌에 올랐다. 그의 즉위는 단순한 왕의 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제가 진정한 강국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의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서 힘을 키우는 성장기였다. 그러나 근초고왕은 더 이상 성장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강한 왕이 되어, 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했다.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며 귀족들의 힘을 조율했고, 백성들을 보호하며 나라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정치가였고, 전략가였다.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자였다. 고구려를 무너뜨리다 백제와 고구려는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오랜 시간 대립해 왔다. 근초고왕은 이를 끝내기로 했다. 그는 먼저 군사를 정비하고, 국력을 다졌다. 그리고 마침내 371년,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으로 진격한
강을 건넌 자, 백제의 시조 온조왕 한강의 물줄기는 거세게 흘렀다. 계절이 바뀌어도 멈추지 않았고, 세월이 지나도 그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저 강을 건넌 자가 있었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결심을 했고, 먼 길을 떠났다. 그가 남긴 발자국 위에 도성이 세워졌고, 그 도성은 나라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온조왕. 백제의 시조였다. 새로운 터전을 찾아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나라를 세운 뒤, 그의 뒤를 이을 자리를 두고 혼란이 일었다. 주몽의 아들들 중 비류와 온조는 왕위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형제는 사람들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낯선 땅이었고, 새로운 시작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지금의 인천)로 향했다. 바닷가에 자리한 땅이었다. 그러나 그곳의 땅은 척박했고, 강한 바람이 불었다. 비류는 끝내 그곳에서 버티지 못하고 좌절했다. 반면, 온조는 한강 유역을 선택했다.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강이 흐르는 땅이었다. 농사도 지을 수 있었고, 성을 쌓기에도 좋았다. 그는 그곳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고 나라를 세웠다. 나라의 이름은 백제(百濟). 사람들을 널리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나라를 세우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
폭풍을 부른 남자, 연개소문 하늘이 짙은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거센 바람이 압록강을 가로질러 평양성의 성벽을 때리고 있었다. 고구려의 땅 위로 거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이 변할 운명이었다. 그 중심에 선 사내, 연개소문. 그는 왕이 아니었으나, 왕보다 강한 자였고, 운명을 쥔 자였다. 그는 폭풍이었다. 혼란 속에서 일어나다 7세기 중반, 고구려는 거대한 위기 속에 놓여 있었다. 영류왕이 즉위한 이후, 고구려는 당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그것은 고구려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굴복에 가까운 정책이었다. 연개소문은 달랐다. 그는 강한 고구려를 원했다. 그는 외세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역사에 깊이 새겨진 것은 642년의 일이었다. 연개소문은 결단을 내렸다. 무기력한 왕을 그대로 두어선 안 된다. 그는 1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갔다. 영류왕은 결국 연개소문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는 왕이 되지 않았다. 그는 막리지(莫離支), 즉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제부터 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강한 고구려를 만들다 연개소문이 집권한 이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라
바람을 가른 왕, 영양왕 동녘 하늘이 붉게 물들던 어느 날, 장대한 고구려의 성벽 위로 묵직한 기운이 감돌았다. 말발굽 소리가 멈추고, 장수들은 숨을 골랐다. 그 위에 서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전장을 꿰뚫는 눈빛을 가진 왕, 영양왕. 그는 거친 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강대한 고구려의 운명을 다시 한 번 움켜쥐려 했다. 혼란의 시대에 왕좌에 오르다 고구려의 역사는 늘 전쟁과 함께였다. 590년, 영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이 되던 시절, 고구려는 안팎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새롭게 등장해 천하 통일을 이루었고, 남쪽에서는 신라가 백제와 손을 잡고 한반도의 세력을 정리하고자 했다. 고구려의 왕좌에 앉는다는 것은 곧 칼날 위에 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영양왕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가 흔들릴 수 없는 거대한 산맥과 같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수나라와의 대결, 전쟁의 시작 새롭게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隋文帝)는 고구려를 자신의 발밑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영양왕은 강대국의 압력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국경을 강화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598년, 결국 수나라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구려로
강철의 왕, 문자명왕 어둠이 짙게 깔린 만주의 대지 위로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새벽녘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무거운 투구를 쓴 사내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한없이 넓은 고구려의 영토가 펼쳐져 있었다. 그는 결코 무너질 수 없는 나라, 천년을 이어갈 제국을 꿈꾸었다. 그의 이름은 문자명왕. 혼란의 시대를 뚫고 문자명왕은 491년, 고구려의 왕좌에 올랐다. 그가 왕이 되던 시절의 고구려는 거센 바람 속에 서 있었다. 장수왕이 남긴 위대한 제국은 강대했지만,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불안이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가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북위가 틈을 엿보고 있었다. 강한 나라일수록 많은 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문자명왕은 왕좌에 앉은 그 순간부터 결심했다. 고구려는 무너지지 않는다. 아니, 더욱 강해질 것이다. 북위를 견제하고 외교를 펼치다 북위는 강대한 나라였다. 중원의 패권을 잡고 있던 이 대제국은 고구려를 압박하며 자신의 세력권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문자명왕은 쉽게 무릎을 꿇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정면으로 북위를 상대하는 대신, 신속하게 외교적 전략을 펼쳤다. 돌궐(突厥)과 같은 북방 민족과 관계를
천하를 품은 왕, 장수왕 왕좌에 오르다 평양성의 아침, 궁전에서는 고요한 바람이 흘렀다. 누군가는 조용히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다. 칼과 말발굽 소리로 대지를 울린 왕들의 시대, 그 가운데서도 한 인물이 우뚝 섰다. 그의 이름은 장수왕. 그는 오랜 시간 고구려를 다스렸고, 제국의 운명을 바꾼 자였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의 아들이었다. 피는 끓었고,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아버지가 넓힌 강토를 더 넓히고, 무너질 수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기원 413년, 젊은 나이였다. 그러나 그 어깨에 걸린 책임은 무거웠다.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라, 지켜야 할 나라의 왕이었다. 수도를 옮기다 그는 생각했다. 고구려가 진정 강한 나라가 되려면, 싸움만으로는 부족하다. 칼날은 언젠가 무뎌지지만, 강한 기둥은 세월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수도를 옮기기로 결심했다. 427년, 고구려의 심장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단순한 도읍의 이동이 아니었다. 이것은 남쪽을 향한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었다. 대륙을 넘어 한반도 깊숙이 들어가겠다는 선언이었다. 백제를 무너뜨리다 수도를 옮긴 후, 장수왕은 백제를 압박했다. 강력한 왕권과 넓어진 국경을 바탕으로
강가에 선 한 사내의 눈빛이 번쩍였다. 광개토대왕. 겨우 열여덟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장대한 북방의 강역을 지배한 사내. 피가 끓고, 바람이 분다. 이 대지의 주인이 누구인가. 바람은 말발굽 소리에 떨고, 강은 전쟁의 함성에 출렁인다. 고구려는 원래 그랬다. 땅이 넓어야 숨을 쉴 수 있었고, 칼날이 번뜩여야 적이 감히 넘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날, 소년왕 담덕의 가슴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고구려의 넓은 강산을 더욱 넓히리라.’ 광개토대왕은 말 위에 올라 바람을 가르며 전장을 누볐다. 요동을 제 손에 쥐었고, 백제의 성을 불태웠으며, 신라가 도와달라 손을 내밀자 달려가 왜구를 몰아냈다. 한강을 두고 백제와 맞섰고, 북으로는 부여를 평정했다. 그 손길이 닿는 곳마다 고구려의 깃발이 펄럭였다. 한 나라의 왕이 아니라 대륙의 주인이었다. 전쟁터에 나서면 광개토대왕은 앞장섰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도 누구보다 먼저 창을 들었고, 땀에 젖은 머리칼이 흩날려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부하들이 물었다. “전하, 어찌하여 몸소 창을 드십니까?” 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앞장서겠느냐.” 적들은 두려워했다. 광개토대왕이 움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