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 고려의 불빛을 밝히다 고려의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었다. 하나는 왕이었고, 또 하나는 불교였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불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렸다. 불교는 오랜 세월 고려의 중심이었고, 때로는 왕보다 더 강한 힘을 가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불교도 흐트러졌다. 선종과 교종이 서로 갈라져 다투었고, 승려들은 제각기 자기 길을 갔다. 부처의 가르침은 하나였으나, 신도들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왕의 아들이었으나, 왕좌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부처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의 이름은 의천.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이었다. 왕의 아들이 되지 않고, 부처의 제자가 되다 왕자로 태어나면, 누구나 왕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의천은 달랐다. 그는 왕좌보다 경전을 원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책을 읽었고, 불경을 외웠다. 신하들은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왕의 자식이 칼을 들지 않고, 불경을 펼치고 있었으니.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승려가 되었다.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부처의 길을 따랐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수도자의 길은 아니었다. 그는 불교를 바꾸고자 했다. 그는 고려의 신앙을 더 깊이 있게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인종, 바람 앞의 등불 고려의 바람은 거칠었다. 왕위는 높았으나, 왕권은 약했다. 신하들은 서로의 힘을 재며 권력을 나누었고, 나라는 흔들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등불은 흔들렸지만, 그래도 꺼지지는 않았다. 고려의 제17대 왕, 인종. 그는 흔들리는 나라를 붙잡고자 했다. 왕은 어려서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그 자리엔 온전히 그의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자리 잡힌 듯했고, 그는 그 틀 안에서 살아야 했다. 왕이라 불렸으나, 왕이라기보다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같았다. 이자겸의 난, 권력의 그림자 왕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왕이 되었다고 모든 것이 왕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실권은 오랫동안 문벌 귀족들에게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자는 이자겸이었다. 왕의 외할아버지이자 최고의 권력자. 이자겸은 왕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왕을 이용하려 했다. 그는 자신의 딸들을 왕비로 들였고,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고려의 왕좌조차 그에게는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과 같았다. 그러나 인종은 조용히 지켜보지 않았다. 그는 왕권을 되찾고자 했다. 1126년, 그는 이자겸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계획은 새어나갔고, 이자겸은 선수를 쳤다.
고려 예종, 배움과 강함으로 나라를 다스리다 고려는 변하고 있었다. 왕이 바뀌었고, 시대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려면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배움이 있어야 했다. 지식이 있어야 나라가 오래갔다. 예종은 그것을 알았다. 그는 고려의 16대 왕이었다. 그의 아버지 숙종은 화폐를 만들었고, 군대를 정비했다. 이제 예종이 고려를 다듬을 차례였다. 그는 단순한 왕이 아니었다. 그는 배우는 왕이었다. 그는 강한 나라를 원했다. 그러나 그 강함은 무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고려를 바꾸려 했다. 그리고 그는 해냈다. 국자감 정비, 배움을 나라의 힘으로 삼다 예종은 배움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고려는 오랫동안 불교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라를 운영하려면 유학이 필요했다. 신하들이 학문을 배우고, 백성들이 지식을 쌓아야 했다. 그래야 고려가 발전할 수 있었다. 그는 국자감(國子監)을 강화했다. 국자감은 고려의 최고 교육 기관이었다. 그러나 예종은 그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문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7재(七齋)라는 전문 교육 과정을 만들었다. 7재는 단순한 학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숙종, 고려를 다시 일으킨 왕 고려는 흔들리고 있었다. 왕권이 약해졌고, 나라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있었다. 문종의 시대는 평화로웠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종이 떠난 뒤, 고려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혼란 속에서 한 사내가 왕이 되었다. 그는 고려의 15대 왕, 숙종이었다. 그는 강한 왕이 되고자 했다. 고려가 다시 강한 나라가 되길 바랐다.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행동하는 왕이었다. 화폐를 만들다, 새로운 경제를 열다 숙종은 경제를 바꾸려 했다. 고려에는 돈이 없었다. 아니, 돈은 있었지만,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건을 물건으로 바꾸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경제가 움직여야 했다. 그는 고려에 화폐를 만들기로 했다. 해동통보(海東通寶). 고려 최초의 주조 화폐였다. 그는 직접 명령을 내리고, 돈을 만들어 유통하게 했다. 사람들은 처음엔 낯설어했다. 그러나 왕이 나서서 밀어붙였다. 화폐는 곧 고려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었다. 화폐를 만든다는 것은 고려가 한 단계 더 성장했다는 의미였다. 이제 고려는 교역이 활발해질 것이었고, 사람들은 돈을 쓰는 법을 익혀야 했다. 그러나 그것이
고려 문종, 고려의 황금시대를 열다 전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왕들은 다투지 않았고, 호족들의 힘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혼란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고려는 이제 무엇이 되어야 할까? 문종은 그 질문에 답하려 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아는 왕이었다.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대신 글을 읽고, 사람을 살폈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혼란보다는 안정을 원했다. 그는 고려를 강한 나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강함이란 단순한 군사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강한 법, 강한 문화, 강한 제도가 필요했다. 그는 그것을 만들었다. 경정전시과, 나라의 틀을 다듬다 나라를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고려는 전쟁을 피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없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신하들에게 줄 땅이 있었고, 관리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문종은 토지 제도를 정비했다. 그는 경정전시과(經正田柴科)를 시행했다. 이전 왕들이 만들었던 전시과는 불안정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신하들이 지나치게 많은 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것을 바로잡았다. 땅을 나누는 기준을 다시 세웠다. 관리들에게 공정하게 토지를 나누었고, 세습을 제한했다.
성종, 고려의 기틀을 세우다 고려는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났다고 곧바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왕건이 세운 나라였고, 광종이 왕권을 다졌지만, 아직 고려는 하나가 아니었다.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를 움직이는 법이 있어야 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야 했다. 성종. 그는 고려의 여덟 번째 왕이었다. 나라는 왕이었지만, 아직 체제가 아니었다. 광종이 칼로 고려를 다듬었다면, 성종은 그 위에 틀을 만들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세웠고, 고려가 진짜 국가가 되도록 했다. 유교 정치, 새로운 질서를 만들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다. 왕건도, 광종도 불교를 믿었다.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절이 많았고, 스님들이 힘을 가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라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성종은 유교를 택했다. 불교는 백성을 다독이기에 좋았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부족했다. 유교는 법과 질서를 강조했다. 신하는 왕을 섬기고, 백성은 그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성종이 원한 세상이었다. 그는 전국에 유교 교육을 퍼뜨렸다.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지방에도 학교를 만들었다. 신하들은 책을 읽고, 유학을 공부해야 했다. 과거제를 통해 인재를 뽑고, 유교적 가치를 행정의
광종, 왕의 길을 걷다 검은 눈을 번뜩이며 세상을 품에 안은 한 사내가 왕좌에 앉았다. 그의 이름은 광종, 고려 제4대 왕. 그는 왕건의 손자였고, 강한 왕이었다. 그러나 강함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고려를 다듬어야 했고, 그 자신도 변해야 했다. 광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949년이었다. 그가 본 고려는 하나가 아니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지 불과 1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통일은 이름뿐이었다. 호족들은 여전히 각자의 땅을 지배하고 있었고, 왕은 그들을 인정해야만 했다. 왕권은 허울뿐이었다. 광종은 그 허울을 벗겨내기로 했다. 그는 왕이 아니라, 고려 그 자체가 되고자 했다. 노비안검법, 권력을 위한 칼날 그가 먼저 손을 댄 것은 호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을 쓰지 않았다. 칼이 아니라 법으로 그들을 베었다. 그 법의 이름은 노비안검법이었다. 고려의 호족들은 전쟁 속에서 노비를 늘렸다. 전쟁은 끝났어도, 그들의 노비는 줄지 않았다. 많은 백성들이 빚을 갚지 못해 스스로 노비가 되었고, 호족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광종은 그것을 부정했다. 나라가 하나라면, 백성도 하나여야 한다. 그의 명령이 떨어졌다. 조사관들이 전국으로 퍼졌다. 호족들의
고려 태조 왕건(王建) – 한 사내가 이룬 나라 세상에는 이름만으로도 시대를 상징하는 자들이 있다. 왕건(王建), 그 또한 그러한 이름이었다. 신라의 기운이 다하고, 후삼국이 어지럽게 엉켜 있던 시절, 그는 어둠을 뚫고 한 시대를 연 사내였다.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고, 그저 운이 좋은 자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세우고, 그 왕조를 천 년 동안 이어지게 한 사내였다. 무너지는 시대, 떠오르는 별 왕건은 877년, 고려 개국 이전의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태어났다. 당시 신라는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세력가들이 스스로를 호족(豪族)이라 칭하며 땅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신라의 힘은 경주의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고, 나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런 틈을 타 후백제의 견훤(甄萱), 태봉의 궁예(弓裔) 등이 일어나 스스로 왕을 칭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왕건은 본래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 출신으로, 아버지 왕륭(王隆)은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단순한 상인의 자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궁예가 태봉을 세우고 세력을 키워갈 무렵, 왕건은 그의 휘하에서 뛰어난 용맹과
후삼국 통일, 고려․․․통합의 리더십 역사의 물결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300여 년, 한반도는 다시금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통일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고, 신라는 쇠락했다. 그리고 강한 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스스로 왕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900년대 초,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혼돈의 시대, 왕이 된 자들 신라는 더 이상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중앙의 권력은 무너졌고, 지방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 힘을 키웠다.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고,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견훤은 야심가였다.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며 신라를 몰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강한 군대를 갖추었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장악했다.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궁예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처음에는 이상적인 군주였다.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펼쳤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모습은 변했다. 독선과 폭정으로 백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918년, 부하들은 결국 그를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왕건이었다. 고려의 시작, 왕건의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과 외교, 그리고 강한 자의 조건 역사는 말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강한 자란 무엇인가. 군사력인가, 외교력인가, 시대를 읽는 통찰력인가. 신라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졌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가 합쳐졌을 때, 676년, 신라는 마침내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신라가 이룬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었는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라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삼국 통일, 그 시작은 배신이었다 7세기 중반. 한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세 나라가 서로를 견제하며 팽팽한 긴장 속에서 버텨왔다. 고구려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백제는 해상 무역과 뛰어난 문화적 역량으로 존재감을 키웠다. 신라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신라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강한 적과 맞서기보다 더 강한 힘을 등에 업기로 한 것이다. 태종 무열왕(김춘추)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국익을 위해 오랜 동맹이었던 백제를 배신했다. 66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무너뜨린다. 백제 의자왕은 항복했고, 사비성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진정한 승자는 마지막까지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