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대로 산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인생이 덧없다는 의미로 많이 쓰인다. 하지만 인생무상은 인생이 덧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고정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노력해봐야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변화하는 삶에 대한 회의때문에 그런 의미로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타고난 사주팔자를 보아도 타고난 명조는 변하지 않지만, 대운은 변화한다. 대운에 비겁운, 식상운, 재성운, 관성운, 인성운 등 다가오는 운에 맞게 삶의 형태가 달라진다. 정해진 길을 따라 태어나서 죽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정해진 길이니, 그냥 내버려두면 될 것 같으나, 그렇지가 않다. 가만히 있고 싶다고 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때그때 당겨오는 운이나 감정에 의해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기쁨과 후회가 교차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해진 삶을 바꾸려면, 사주팔자를 볼 필요가 없다.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조금이라도 미리 알고 싶다면, 사주를 펼쳐보는 것이다. 사주를 본다고 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외형적인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나의 배우자는 어떤 사람이며, 나의 자녀는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등에 대하여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싶다면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흙수저로 태어나고 금수저로 태어나는 것이 내 뜻이 아니다. 멀쩡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망하고, 사이좋던 배우자가 느닷없이 바람을 핀다. 그렇게 말 잘 듣던 자녀들이 반항을 하고 덤벼드는가 하면, 도저히 가망이 없을 것 같던 자녀가 돈 버는 재주는 출중하여 훌륭한 사업가가 된다. 멀쩡히 아침에 출근한 남편과 아내가 죽어서 돌아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도, 어떤 사람은 일만 벌이면 대박을 터뜨리고, 어떤 사람은 일만 벌이면 깡그리 털어먹는다. 이것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주팔자를 알면 인간의 삶을 정확히 알 수 있느냐? 절대로 그렇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그들의 사주팔자를 비교하여 공통적인 것들을 통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 사주학이다. 10개의 천간과 12개의 지지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이것으로 어떻게 수십억명의 인구 중에서 단 한명도 똑같은 인간이 없는 개인의 삶을 세세하게 알 수 있겠는가? 사주팔자를 펼쳐보는 사람의 실력이 좋다면, 조금이나마 구체적일 수는 있다. 구체적이라고 해봐야 평생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특별한 몇 가지를 알려주는 것이요, 세운이라고 해봐야 1년 동안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중에서 특별한 몇 가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특별한 몇 가지는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니,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특별한 몇 가지만이라도 알 수 있다는 것이 사주학의 장점이다.
인간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이만큼이라도 알 수 있는 학문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주팔자를 펼쳐보는 것이다.
생시를 논하자면, 태어나는 시간마다 모두 제각각 다른 삶을 살아가는데, 두 시간을 묶어서 같은 시간에 분류해 놓는 것은 시계가 없던 시절에 분석의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사주팔자의 시주는 하루를 두 시간마다 나누는 것이다. 그것을 분 단위로만 다르게 나누어도, 두 시간이면 120분이니, 현재 사주팔자를 보는 방법의 120배가 늘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사주라도 같은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똑같은 사주라도 시골에서 사는 삶과 도시에서 사는 삶이 다른 것이요, 큰 나라와 작은 나라에서 사는 삶이 다른 것이요, 더운 지방에서 사는 삶과 추운 지방에서 사는 삶이 다른 것이니, 같은 사주라도 똑같은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정해진 삶의 길을 따라서, 타고난 사주팔자의 범위 안에서 살다가는 것이다. 다만, 살아있는 인간은 의지가 약해지라고 해서 의지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고, 의지가 강해지라고 해서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타고난 사주팔자와 더불어 그 시기에 자신에게 부족한 오행이나 당겨오는 운에 이끌려서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인생을 포기하면서 살라고 해도 포기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만족스럽지 않아도 하늘의 명(命)을 받아 태어난 삶이니, 주어진 삶을 살다가야 한다. 절대로 스스로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늘의 명(命)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절망의 늪에 빠져서 깊은 시름에 빠져 있을 때, 새로운 인연이 나타나서 희망의 싹이 나오고, 또 그렇게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살아가는 것이다. 이 또한 논리적으로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만이 아는 것이다. 그래서 때때로 앞날이 궁금하면, 그 누구도 개개인의 삶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하늘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난 삶이니, 하늘의 기운에 앞날을 묻는 것이다. 주역이든, 매화역수든, 육효든 방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주로 모든 운명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사주는 범주를 이야기 할 뿐 개인의 삶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주를 본다는 것은 밝은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좀더 바람직한 삶을 사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좋은 행동, 좋은 말, 밝은 미래를 향한 행위 등을 한다면, 이미 그 사람의 미래는 좋은 쪽으로 펼쳐짐을 의미한다. 사주를 보는 것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운명은 결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판단하는 사주가 운명 그 자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범주일 뿐이다.
현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면, 명상이나 종교에 의지하는 것이 좋다. 명상이나 종교를 통하여 영(靈)적인 세계인 하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적 합의에 근거한 건강한 삶에 도움이 되는 명상이나 종교라면, 불교든 기독교든 유교든 이슬람교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새벽에 정안수를 떠놓고 천지신명에게 소원을 비는 것도 기성 종교의 신앙심에 결코 뒤지는 것이 아니다.
지나는 길에 들은 불경 소리, 찬송가 소리, 공자님 말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인생과는 다른, 더 나은 삶의 전개를 예고하여주는 것일 수 있다.
좋은 인연을 만나면,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정해진 삶의 길이 좋은 길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인연 따라 가는 삶이지만, 아무리 좋은 인연을 만나도 아무리 일이 잘 풀려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
사주학에 관심이 있다면, 사주팔자를 알고 자신의 다가오는 운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건강을 위해서는 자신의 사주를 잘 분석하여, 부족한 오행을 음식이나 운동으로 보충하고, 너무 강한 오행을 설기시키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 건강을 잃으면 회복하기 어렵다. 건강한 삶을 위하여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한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사주학을 신뢰한다면, 가만히 있을래야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사주팔자는 대운을 따라 세운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