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佛法) 위에 세운 나라, 법흥왕 그 옛날 신라 땅을 스쳐 가던 바람이 지금도 대릉원의 무덤들을 넘고, 황룡사터를 휘돌아 흐른다. 그 바람 속에는 무수한 이름들이 섞여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 시대를 연 이름이 있다. 법흥왕(法興王). 신라를 나라답게 만들고, 불교를 통해 백성을 하나로 묶었던 왕. 왕권을 다지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결국 신라를 삼국통일로 향하는 길목에 세운 자. 그가 없었다면 신라는 그저 작은 나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율령을 반포하다, 신라를 법으로 세우다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던 시기, 신라는 여전히 부족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왕이 있었지만 귀족들의 권한이 강했고, 나라의 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법이 있어야 했고, 그 법을 다스리는 왕이 있어야 했다. 그는 ‘율령’을 반포했다. 신라 최초의 국가적 법률이었다. 이제 나라에는 규칙이 생겼고, 모든 것이 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의 권력도, 신하들의 권한도, 백성들의 삶도 법 안에서 이루어졌다.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은 단순한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가 이제 진정한 국가로 거듭났다는 선언이었다. 불법을 받아들이고, 신라를
바람 속에 새긴 이름, 지증왕 경주의 들판 위로 바람이 불었다. 오래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 바람은 늘 같은 듯 다르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의 숨결을 품었고, 그 바람 속에는 한 시대를 연 이름도 함께 실려 있다. 지증왕(智證王), 신라의 22대 왕. 나라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길을 열었던 임금. 사람들은 그를 ‘소를 기르던 왕’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저 소를 기른 것만이 아니라, 신라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고, 백성의 삶을 바꾸었다. 신라는 그의 손에서 비로소 나라다워졌다. 신라라는 이름을 세우다 지증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신라는 ‘사로국(斯盧國)’이라 불렸다. 혁거세 이후 몇백 년이 지났어도 나라의 이름조차 확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신라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채택하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명칭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신라는 더 이상 여러 부족이 연합한 느슨한 공동체가 아니라, 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다. 그가 바꾼 것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그는 지방을 정비하고, 관리들을 파견해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게 했다. 나라는 더 이상 경주에
강물처럼 흘러간 내물왕의 시간 대릉원의 고분들 위로 스치는 바람은 천오백 년을 뛰어넘어 여전히 같은 길을 돈다. 먼지 한 톨까지도 세월이 묻어 있는 경주의 땅을 밟으며 사람들은 잊힌 이름들을 떠올린다. 알영과 혁거세의 신화처럼 빛나진 않지만, 신라가 작은 나라에서 왕국으로 나아가던 그 갈림길에 서 있던 한 사람, 내물왕을 떠올려 본다. 내물 마립간. 신라의 17대 왕.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등장한 첫 번째 왕. 그 전까지는 모두 “이사금”이었다. 왕이라기보다 대중의 추대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 그러나 내물왕은 그저 백성들의 손에 의해 세워진 지도자가 아니었다. 신라는 그의 시대를 기점으로 왕의 권력이 확립되었고,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춘 나라가 되었다. 그는 바람처럼 왔다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강물처럼 깊고 넓었다. 철기 문명을 확립한 왕 내물왕이 즉위한 4세기 후반, 신라는 아직 약소국에 불과했다.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강력한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남쪽에는 왜(倭)의 세력이 꿈틀댔다. 철이 있었지만 철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했다. 농기구와 무기가 여전히 덜 정교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수세에 몰리는 일이 많았다
신라의 첫 걸음, 박혁거세 해가 동쪽에서 떠올랐다. 신라 땅의 들판은 아직 고요했고, 먼 산에는 안개가 걸려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빛이 내렸다. 사람들은 놀랐다. 한 마리 백마가 하늘을 향해 울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사람들은 신의 뜻이라 믿었다. 그렇게 신라의 첫 왕,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세상에 나왔다. 하늘이 낸 왕, 신라를 열다 박혁거세는 서기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 앞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즉위한 곳은 서라벌, 훗날 경주로 불릴 땅이었다.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모셨고, 신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처음엔 ‘사로국(斯盧國)’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그 이름은 신라(新羅)로 바뀌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땅을 정비하고, 제도를 만들며, 부족 간의 갈등을 조정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신앙과 문화를 정비했다. 신라의 시작은 박혁거세의 손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의 기틀을 다지다 박혁거세가 통치하는 동안, 신라는 점차 성장했다. 그는 우선 농업을 장려했다. 물길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농사를
백제의 마지막 칼날, 계백 황산벌의 대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먼지와 피가 섞인 전장 속에서 한 장수가 마지막까지 칼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백제의 충신이었고, 마지막까지 나라를 위해 싸운 장수였다. 이름은 계백. 그의 칼은 백제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지만, 그의 충의는 영원히 기억되었다. 혼돈의 시대, 백제의 장군이 되다 660년, 백제는 기로에 서 있었다. 의자왕은 신라를 압박하며 과거 백제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으나,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부여)은 이제 곧 공격받을 운명이었다. 나라를 지킬 최후의 전선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전선의 중심에 계백이 있었다. 그는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백제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고, 백제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의자왕은 그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황산벌을 사수하라. 황산벌 전투, 백제의 운명을 건 싸움 계백은 5천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황산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앞에 놓인 적은 너무나도 강했다. 신라군은 김유신이 이끄는 5만 대군이었다. 계백은 전세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 처단했다. “
백제의 마지막 불꽃, 의자왕 한강에서 시작된 강국의 기운이 점차 약해져 갔다. 바람은 거세게 불었고, 전쟁의 불길은 다시금 백제를 집어삼키려 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그 모든 격랑 속에서 왕좌에 올랐다. 그는 강한 왕이었고, 야망을 품은 자였다. 그러나 그의 시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몸부림과 함께, 몰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강한 왕의 등장 의자왕은 641년, 백제의 31대 왕으로 즉위했다. 그의 아버지 무왕은 불교를 통해 백제를 하나로 묶고자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국력이 쇠퇴하고 있었다. 의자왕은 무너져 가는 백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전쟁을 준비했다. 그는 즉위 초반, 강력한 개혁을 단행하며 왕권을 강화했다.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다지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했다.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신라였다. 한때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었지만, 이제는 서로를 견제하는 적이 되었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백제는 이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의자왕은 먼저 신라를 공격하며 전쟁의 흐름을 백제 쪽으로 돌리려 했다. 신라를 압박하다 642년, 의자왕은 신라의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의
미륵의 나라를 꿈꾼 왕, 백제 무왕 백제의 대지가 붉게 물들었다. 서쪽으로 해가 저물어 가고, 왕궁의 지붕 너머로 미륵사의 황금빛 불탑이 빛났다. 한 사내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 칼을 들었던 왕이었지만, 동시에 불법을 세우고 백제를 부흥시키려 했던 자였다. 그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꿈꾼 개혁자였다. 그의 이름은 무왕이었다. 강변의 아이, 왕이 되다 무왕은 기이한 출생설화로 전해진다. ‘서동’이라는 이름으로 강가에서 태어나 자랐고, 농사를 짓던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농부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가 왕좌에 오른 순간, 백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600년, 그는 백제의 왕이 되었다. 그의 즉위는 백제의 운명을 다시 한 번 뒤흔드는 사건이었다. 성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후, 백제는 점점 쇠약해졌다. 그러나 무왕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전쟁과 확장,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다 무왕의 시대, 한반도는 전쟁의 시대였다.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는 여전히 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백제는 두 나라의 위협 속에서 생존해야 했다.
사비에 새긴 꿈, 백제 성왕 강이 흐르는 곳에 도시가 있었다. 벽돌이 쌓이고,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도시는 더 이상 웅진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한 왕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는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는 개혁자였고, 사비라는 새로운 땅에서 미래를 설계한 개척자였다. 그의 이름은 성왕이었다. 웅진을 떠나 사비로 523년, 성왕이 왕좌에 올랐다. 그의 앞에는 두 개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무령왕이 닦아 놓은 안정적인 백제를 유지하는 길,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변화하는 길. 그는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538년, 성왕은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겼다. 웅진은 방어하기 좋은 곳이었지만, 더 이상 백제의 미래를 담을 그릇이 아니었다. 한강을 잃은 백제에게는 새로운 중심지가 필요했다. 사비는 강과 가까웠고, 교역을 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성왕은 이곳에서 다시 한강을 향한 꿈을 꾸었다. 그는 단순히 수도를 옮긴 것이 아니었다. 사비는 새롭게 계획된 도시였다. 궁궐을 짓고, 도로를 정비하고, 나라의 틀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그는 백제의 이름마저 바꾸었
강을 넘어 부흥을 꿈꾼 왕, 무령왕 바람이 잔잔하게 불었다. 금강의 물줄기는 한없이 흐르고, 그 강변에는 웅진성이 우뚝 서 있었다. 백제의 역사는 폭풍 속에서 흔들렸지만, 한 왕이 그 바람을 가르고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그는 강한 자였다. 단순한 전사가 아니라, 백제를 다시 세운 개혁자였다. 그의 이름은 무령왕이었다. 다시 일어선 백제 501년, 동성왕이 귀족들의 손에 암살당했다. 왕권은 흔들리고, 백제는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그 혼란 속에서 무령왕은 왕위에 올랐다. 그는 단순한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가 왕이 된 순간부터, 백제는 다시 강한 나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의 시대, 백제는 더 이상 한강을 차지한 강대국이 아니었다. 475년 개로왕이 고구려에게 패배하며 한성을 빼앗겼고,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백제는 방어에 급급했다. 그러나 무령왕은 웅진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겠다고 결심했다. 왕권을 강화하다 무령왕은 먼저 내부의 혼란을 정리했다. 귀족 세력의 반란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면서도 귀족들의 힘을 완전히 짓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균형을
찬란한 동맹, 백제의 개척자 동성왕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때, 한강 위로 저녁노을이 번져갔다. 강변에 선 한 사내는 조용히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저 강은 고구려의 땅을 지나 중국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저 너머에는 신라가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백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나아가 번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이 필요했다. 강을 건너야 했다. 그는 백제의 왕, 동성왕이었다. 무너진 나라를 다시 세우다 백제는 한때 강성한 나라였다. 근초고왕이 전성기를 열었고, 한반도 남부와 일본까지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475년, 한성을 지키지 못한 백제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왕과 수도를 잃었다. 개로왕이 전사했고, 수도는 한성에서 웅진(공주)으로 옮겨졌다. 나라의 기둥이 흔들렸고, 백제는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 479년 동성왕이 즉위했다. 왕좌에 오른 순간부터 그는 결심했다. 백제를 다시 세울 것이라고. 더 이상 패배하지 않겠다고. 백제는 다시 한 번 한반도의 강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신라와 손을 잡다 동성왕은 생각했다. 백제가 홀로 강해질 수는 없다. 힘을 키우려면 동맹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동맹 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