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왕좌, 혜공왕 신라 제36대 왕, 혜공왕. 왕이라 불렸으나 왕이 아니었다. 왕좌에 앉았으나 권력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신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시대는 어지러웠고, 권력은 피를 부르며 흔들렸다. 그는 그 모든 격랑 속에서 오직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뜻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힘이 없었고, 그를 지켜줄 이도 없었다. 끝내, 그는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한 번이라도 온전히 신라의 왕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어린 왕, 왕좌에 오르다 혜공왕은 어렸을 때 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경덕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왕좌는 단숨에 그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자리가 아니었다.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들이 힘을 키우던 시대였다. 어린 왕이 즉위하자, 실권은 왕이 아니라 귀족들이 가졌다. 신라는 이제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왕은 허울뿐이었고, 진짜 권력은 궁궐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혜공왕은 왕이었지만,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나라의 정책은 귀족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고, 왕이 아닌 대귀족들이 나라를 움직였다. 신라는 혼란스러웠고, 왕권은 점점 더 흔들렸다. 그는 그것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별을 세운 왕, 원성왕 먼 산자락에는 구름이 걸려 있었고, 남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천 년 전에도, 지금도. 하지만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이름이, 신라의 한 왕이 바람 속에서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원성왕(元聖王). 그는 혼란의 시대를 살았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왕위는 피바람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했다. 왕이 바뀔 때마다 귀족들은 충성을 갈아타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았다. 그런 시대에, 그는 왕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또 다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혼란의 시대를 뚫고 왕이 되다 원성왕은 신라의 38대 왕이었다. 그의 즉위는 단순한 왕위 계승이 아니었다. 통일 후 신라는 왕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열왕계와 문무왕계의 혈통이 엇갈리며 왕위 다툼이 계속되었고, 진골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그 와중에, 그는 왕이 되었다. 스스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왕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정적을 견제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권력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았다. 신라가 더 이상 왕위 다툼에만 휘둘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라가 다시 강해지려면, 새
바다를 지킨 왕, 신라 문무대왕 동해의 푸른 물결 위로, 천 년을 넘은 파도가 다시 밀려온다. 그 물결 속에는 한 왕의 혼이 잠들어 있다. 뭍이 아닌 바다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은 왕. 신라를 삼국통일로 이끈 군주, 그러나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스스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왕. 그의 이름은 문무왕(文武王). 그는 신라의 왕이었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칼을 들었던 군주였다. 그러나 칼보다도 더 깊은 것은 그의 뜻이었다. 통일의 문을 열었으나, 그 문 너머에는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다가 되어, 끝없이 흐르는 물결이 되어 신라를 지키려 했다. 전쟁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다 문무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라의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 신라 최고의 장군 김유신이 있었다. 아버지가 길을 열었고, 김유신이 칼을 들었으며, 그는 그 길의 끝을 마무리했다. 그가 왕이 되던 661년, 신라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백제는 멸망했지만, 부흥군이 일어나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고구려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나라가
칼과 별, 그리고 신라의 길 – 김유신 경주의 들판을 스치는 바람은 천 년 전에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는 누군가의 숨결이 남아 있다. 말을 타고 대지를 달렸던 사내, 칼을 들고 신라를 지켜낸 장군, 삼국통일의 문을 연 영웅. 그의 이름은 김유신(金庾信). 신라는 그의 칼끝에서 운명이 결정되었고, 그가 남긴 길 위에서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는 장수가 아니었으면 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지 않았다. 대신 신라를 삼국 중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화랑에서 장군으로, 신라를 짊어지다 김유신은 화랑이었다. 단순한 무사가 아니라, 신라의 정신을 배운 자였다. 화랑도는 그저 군사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었고, 젊은이들에게 나라를 위한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곳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칼을 들었으며, 신라의 하늘과 땅을 익혔다. 그가 처음 이름을 떨친 것은 백제와의 전투에서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는 늘 선봉에 섰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피 흘리며 싸웠다. 그러나 김유신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어떻게 이길 것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
하늘의 별을 보다, 신라 선덕여왕 신라의 궁궐 기와 위를 스친 바람은 황룡사의 누각을 어루만졌다.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의 흐름을 읽고, 세상의 변화를 예감했다. 남자들만이 왕이 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녀는 왕이 되었다.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 그녀는 칼을 들지 않았지만, 전쟁보다 더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 속에서, 신라를 지키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을 읽고, 세상을 다스렸다. 여왕이 된다는 것 그녀가 왕이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신라는 왕권이 강해졌지만, 여전히 귀족들이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왕의 혈통이었어도 여자라는 이유로 왕이 되지 못하던 시대. 하지만 선덕은 달랐다. 법흥왕과 진흥왕이 닦아 놓은 강한 신라, 그 기반 위에서 그녀는 왕이 되었다. 남자들은 불만을 가졌다. 왕은 칼을 들고 전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지켰다. 그녀는 지혜로 싸웠고, 예지로 다스렸다. 신라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하늘을 읽고, 미래를 예견하다 선덕
영토를 넓히고 길을 닦다, 신라 진흥왕 오래전 한 사내가 거센 바람을 맞으며 산을 올랐다. 높은 곳에서 멀리까지 신라의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나라가 더 넓어져야 한다고. 신라의 왕이라면, 백성들이 갈 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그 사내는 바로 진흥왕(眞興王). 그는 단순한 왕이 아니었다. 신라의 지도를 다시 그렸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기 위해 길을 닦았다. 그가 만든 길 위에서 신라는 걷고 또 걸어 결국 삼국을 통일하는 나라로 나아갔다. 영토를 넓히다, 신라의 경계를 새로 그리다 진흥왕이 즉위했을 때 신라는 아직 작은 나라였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왕권을 세웠지만, 신라의 힘은 충분하지 않았다. 삼국은 서로 싸우고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는 이미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달랐다. 그는 신라가 더 이상 작은 나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백제의 영토를 빼앗았다. 한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의 중심지였고, 물자가 오가는 길이었으며, 삼국이 모두 탐내는 땅이었다. 진흥왕은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신라를
불법(佛法) 위에 세운 나라, 법흥왕 그 옛날 신라 땅을 스쳐 가던 바람이 지금도 대릉원의 무덤들을 넘고, 황룡사터를 휘돌아 흐른다. 그 바람 속에는 무수한 이름들이 섞여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 시대를 연 이름이 있다. 법흥왕(法興王). 신라를 나라답게 만들고, 불교를 통해 백성을 하나로 묶었던 왕. 왕권을 다지고,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결국 신라를 삼국통일로 향하는 길목에 세운 자. 그가 없었다면 신라는 그저 작은 나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율령을 반포하다, 신라를 법으로 세우다 법흥왕이 왕위에 오르던 시기, 신라는 여전히 부족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왕이 있었지만 귀족들의 권한이 강했고, 나라의 틀도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나라가 제대로 서려면 법이 있어야 했고, 그 법을 다스리는 왕이 있어야 했다. 그는 ‘율령’을 반포했다. 신라 최초의 국가적 법률이었다. 이제 나라에는 규칙이 생겼고, 모든 것이 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의 권력도, 신하들의 권한도, 백성들의 삶도 법 안에서 이루어졌다. 법흥왕이 반포한 율령은 단순한 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가 이제 진정한 국가로 거듭났다는 선언이었다. 불법을 받아들이고, 신라를
바람 속에 새긴 이름, 지증왕 경주의 들판 위로 바람이 불었다. 오래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 바람은 늘 같은 듯 다르다.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의 숨결을 품었고, 그 바람 속에는 한 시대를 연 이름도 함께 실려 있다. 지증왕(智證王), 신라의 22대 왕. 나라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길을 열었던 임금. 사람들은 그를 ‘소를 기르던 왕’이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그는 그저 소를 기른 것만이 아니라, 신라를 하나의 나라로 만들고, 백성의 삶을 바꾸었다. 신라는 그의 손에서 비로소 나라다워졌다. 신라라는 이름을 세우다 지증왕이 즉위하기 전까지 신라는 ‘사로국(斯盧國)’이라 불렸다. 혁거세 이후 몇백 년이 지났어도 나라의 이름조차 확고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신라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채택하고,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명칭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신라는 더 이상 여러 부족이 연합한 느슨한 공동체가 아니라, 왕이 다스리는 국가가 되었다. 그가 바꾼 것은 이름뿐이 아니었다. 그는 지방을 정비하고, 관리들을 파견해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게 했다. 나라는 더 이상 경주에
강물처럼 흘러간 내물왕의 시간 대릉원의 고분들 위로 스치는 바람은 천오백 년을 뛰어넘어 여전히 같은 길을 돈다. 먼지 한 톨까지도 세월이 묻어 있는 경주의 땅을 밟으며 사람들은 잊힌 이름들을 떠올린다. 알영과 혁거세의 신화처럼 빛나진 않지만, 신라가 작은 나라에서 왕국으로 나아가던 그 갈림길에 서 있던 한 사람, 내물왕을 떠올려 본다. 내물 마립간. 신라의 17대 왕. “마립간”이라는 칭호가 등장한 첫 번째 왕. 그 전까지는 모두 “이사금”이었다. 왕이라기보다 대중의 추대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 그러나 내물왕은 그저 백성들의 손에 의해 세워진 지도자가 아니었다. 신라는 그의 시대를 기점으로 왕의 권력이 확립되었고,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강한 군사력을 갖춘 나라가 되었다. 그는 바람처럼 왔다가 강물처럼 흘러갔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은 강물처럼 깊고 넓었다. 철기 문명을 확립한 왕 내물왕이 즉위한 4세기 후반, 신라는 아직 약소국에 불과했다. 동쪽으로는 바다, 서쪽으로는 강력한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남쪽에는 왜(倭)의 세력이 꿈틀댔다. 철이 있었지만 철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했다. 농기구와 무기가 여전히 덜 정교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수세에 몰리는 일이 많았다
신라의 첫 걸음, 박혁거세 해가 동쪽에서 떠올랐다. 신라 땅의 들판은 아직 고요했고, 먼 산에는 안개가 걸려 있었다. 그때 하늘에서 빛이 내렸다. 사람들은 놀랐다. 한 마리 백마가 하늘을 향해 울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사람들은 신의 뜻이라 믿었다. 그렇게 신라의 첫 왕,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세상에 나왔다. 하늘이 낸 왕, 신라를 열다 박혁거세는 서기전 69년, 여섯 마을의 촌장들 앞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즉위한 곳은 서라벌, 훗날 경주로 불릴 땅이었다.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모셨고, 신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가 세운 나라의 이름은 처음엔 ‘사로국(斯盧國)’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그 이름은 신라(新羅)로 바뀌었다. 그는 나라를 다스리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땅을 정비하고, 제도를 만들며, 부족 간의 갈등을 조정했다. 그리고 모든 백성이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신앙과 문화를 정비했다. 신라의 시작은 박혁거세의 손에서 비롯되었다. 신라의 기틀을 다지다 박혁거세가 통치하는 동안, 신라는 점차 성장했다. 그는 우선 농업을 장려했다. 물길을 정비하고, 백성들에게 농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