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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한 시간에 끝내는 미국사 이야기

 

제1장 신대륙의 발견과 식민지 시대의 시작
1. 먼 바다의 끝, 낯선 땅의 첫 발자국
땅은 거기 있었다. 아득한 대양 건너, 안개 낀 해안선 너머로 숲은 숲대로, 강은 강대로 흐르고 있었고, 그 속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해가 뜨면 사냥에 나섰고, 해가 지면 불가에 둘러앉아 조상의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 하지만 그 평온한 계절 속에 바람이 방향을 틀던 어느 해, 돛단배가 들이닥쳤다. 유럽의 눈으로는 ‘발견’이었지만, 이 땅을 딛고 살아온 이들에겐 침입이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의 깃발을 달고 카리브 해에 다다랐을 때, 그는 아시아에 도달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디딘 곳은 아메리카 대륙, 유럽이 이름 붙이지 못한 신세계였다. 콜럼버스는 처음으로 대륙을 ‘알아본’ 자였을 뿐, 이 땅은 이미 수천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고향이었다. 아즈텍, 마야, 이누이트, 이로쿼이… 나무와 물, 태양과 별과 말을 나누던 이름들이 그 땅 위에 수없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쇠로 만든 갑옷을 입고 화승총을 든 유럽인들은 그들이 믿는 신의 이름을 내걸고, 무자비한 손을 뻗었다. 콜럼버스는 단지 서막이었다. 수많은 탐험가와 정복자들이 몰려왔고, 원주민은 병들고 쓰러졌다. 그들에게는 항체가 없었고, 유럽의 탐욕 앞에 무력했다. 바다 건너 온 이들은 신대륙을 ‘빈 땅’이라 불렀고,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에게 문명을 선물했다고 믿었다.
실상은 유린이었고, 착취였으며, 한 시대의 종말이었다. 그러나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되기도 했다. 유럽과 아메리카, 두 대륙의 운명은 그날 이후 단단히 엉켜버렸다.

 

2. 영국의 이주민들, 믿음의 배를 타고
17세기, 영국의 좁은 골목과 억압적인 왕권 체제 아래서 누군가는 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고, 누군가는 더 나은 삶을 찾아 긴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대륙은 불안과 희망이 섞인 땅이었고, 사람들은 믿음과 욕망을 담아 그곳으로 향했다.
1607년, 버지니아에 제임스타운이 세워졌고, 13년 뒤 퓨리턴(청교도)들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플리머스에 닻을 내렸다. 그들이 찾은 건 종교의 자유였다. 왕의 교회 아래에서 신앙을 지키기 어려웠던 이들은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으로 왔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풍토는 험했고, 농사 방법도 몰랐으며, 추위는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첫해에 죽어갔고, 살아남은 자들은 원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겨우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추수감사절’은 그 겨울을 견딘 자들의 작고 소박한 위로였다.
그들은 신을 위한 마을을 만들었고, 학교를 세웠으며, 성경을 가르쳤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 역시 다른 믿음을 탄압했고, 원주민의 땅을 ‘신이 주신 땅’이라며 점점 차지해 나갔다. 아이러니였다. 박해를 피해 떠나온 자들이 또 다른 박해자가 되었다.
이주민들은 오두막을 짓고, 밭을 갈며 공동체를 일궈갔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어느새 하나의 ‘식민지’가 되었고, 식민지는 왕의 이름 아래 놓인 또 다른 영토가 되었다. 믿음은 살아 있었지만, 현실은 정치였다.

 

3. 13개 식민지, 서로 다른 얼굴 하나의 줄기
이후 100여 년 동안 대서양을 건너온 사람들은 북미 동부 해안선을 따라 정착했다. 메사추세츠에서 조지아까지, 13개의 식민지가 하나둘 모습을 갖췄다. 각기 다른 시기와 방식으로 태어났지만, 그들 모두는 ‘영국의 식민지’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이 달랐다.
뉴잉글랜드 지역(북부)은 종교 공동체가 중심이었다. 퓨리턴(Puritan)의 기도 소리와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의 질서, 공립학교가 뿌리를 내렸다. 상공업과 어업, 조선업이 발달하며 도시가 성장했고, 자치회의 전통도 탄탄하게 쌓였다.
중부 지역은 조금 느슨했다. 뉴욕, 펜실베이니아 등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섞였고, 무역이 활발했다. 특히 퀘이커교도들이 만든 펜실베이니아는 관용의 공간이었다.
남부 식민지는 토지와 노예 노동으로 돌아갔다. 담배, 쌀, 인디고 같은 플랜테이션 작물이 중심이었고, 귀족 중심의 농장주들이 경제와 정치를 좌우했다.
이들 13개 식민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지만, 공통의 경험도 있었다. 영국으로부터의 간섭, 세금, 무역 규제에 대한 불만은 점차 누적되었다. 왕은 바다 너머에 있었고, 현실의 문제는 식민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자치의 감각이 생기고, 독립의 기운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태어난 첫 세대, ‘아메리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이 등장하게 된다.

 

제2장 독립을 향한 걸음
1. 두 제국의 그림자, 프렌치-인디언 전쟁
땅은 점점 더 깊숙이 열리고 있었다. 동쪽 해안에서 시작된 식민지는 점차 내륙으로 확장되었고, 어느 순간 영국의 국기와 프랑스의 휘장이 같은 숲을 놓고 맞붙게 되었다. 북미 대륙은 이제 유럽의 제국주의가 부딪히는 전장이 되었다.
1754년, 오하이오 강 유역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시작한다. 이 전쟁은 단지 유럽의 싸움이 대서양을 건너온 것이 아니라, 북미 땅을 두고 실제로 벌어진 ‘현장’의 싸움이었다.
프랑스는 인디언들과 손을 잡았다. 그들에게 총과 화약을 건네주었고, 그들은 숲속에서 능숙하게 영국군을 공격했다. 이 전쟁은 훗날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 불리게 되었지만, 인디언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영국은 결국 승리했다. 1763년 파리조약으로 프랑스는 미시시피강 동쪽 대부분의 영토를 영국에 넘겼다. 대륙의 절반이 영국의 것이 되었고, 식민지인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영국은 돈이 없었다. 7년 전쟁의 전비는 치솟았고, 본국의 부담은 무거웠다. 왕은 생각했다. “누구를 위해 싸운 전쟁인가? 식민지를 위해 싸운 것 아닌가?” 그러니 이제, 식민지가 값을 치를 차례라고.

 

2. 차 한 잔의 분노, 보스턴의 밤
세금은 느릿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도착했다.
영국 의회는 차례차례 조세를 부과했다. 설탕법(1764), 인지세법(1765), 타운젠드 법(1767). 식민지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납세의무자’가 되었고, 그 세금은 자신들이 뽑은 대표 없이 결정되었다.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라는 구호가 거리마다 붙었고, 민병대가 훈련을 시작했다.
1773년, 영국은 마지막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차법(Tea Act)이 통과되었고, 동인도 회사가 독점적으로 차를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싸게 팔았지만, 문제는 원칙이었다. 식민지 사람들은 그 싸구려 차를 거부했다.
보스턴.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항구도시에 어둠이 내려앉던 밤, 인디언 복장을 한 이들이 배 위에 올라탔다. 그들은 차 상자를 끌어내어 바다에 던졌다. 찻잎은 찬 바닷물 위에서 흩어졌고, 이 사건은 곧 ‘보스턴 차 사건’이라 불렸다.
영국은 격분했다. 보스턴 항 폐쇄, 매사추세츠 자치권 박탈, 군대의 주둔 확대. 강경한 조치가 연이어 발표되었고, 식민지 전체가 불길처럼 들끓었다. 한 도시의 일이 아니라, 열세 식민지의 공동의 분노가 되었다.

 

3. 총성이 울린 들판, 레스턴과 콩코드
1775년 봄, 레스턴(Lexington)과 콩코드(Concord). 마차는 멈추었고, 총성이 울렸다. 아직 나라의 이름은 없었지만, 전쟁은 시작되었다. 영국군은 무기를 압수하려 했고, 식민지 민병대는 총을 들었다.
누가 먼저 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첫 발이 울린 그 순간, 더 이상 되돌릴 수는 없었다.
버지니아의 젊은 대의원 조지 워싱턴, 매사추세츠의 불같은 사무엘 애덤스, 불꽃 같은 말쟁이 패트릭 헨리,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 식민지의 이름들이 하나둘 모여 제1차 대륙회의를 열었고, 사람들은 조금씩 ‘독립’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런던에서는 그저 반란이라 여겼지만, 대서양을 건너본 적 없는 사람들은 결코 식민지의 분노와 열기를 체감하지 못했다.

 

4. 1776년의 선언,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내일
그리고 1776년 7월 4일.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는 그들에게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부여하였다.”
펜실베이니아의 회의장에서 읽혀진 독립선언문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이 왕에게 주었던 권위를 찢어버리는 글이었고, 인간의 존엄을 기초로 한 정치의 출발 선언이었다.
토마스 제퍼슨이 쓴 그 선언문은 아직 채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이었고, 노예제를 그대로 품고 있었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영국의 왕은 적이 되었고, 식민지 사람들은 이제 ‘미국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날, 하늘은 맑았고, 피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이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왕은 포기하지 않았고, 식민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싸움은 새로운 나라의 탄생을 알리는 진통이 되었다.

 

제3장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
1. 겨울의 군대, 바래지는 얼음 위의 각오
전쟁이 선언되고, 총성이 오갔지만, 초반의 싸움은 녹록지 않았다. 식민지 군대는 정규군이 아니었고, 군자금도 턱없이 부족했다. 병사들은 얼어붙은 땅을 맨발로 걷고, 나무껍질을 끓여 허기를 달랬다.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농장주였고, 권위도 경력도 반쯤은 기대에 불과했지만, 누군가는 군대를 이끌어야 했다. 그는 검은 코트를 걸치고 버지니아 억양을 유지한 채 북부의 차가운 겨울을 견뎠다.
1777년 겨울, 밸리 포지에서 그들은 거의 무너졌다. 병사들은 썩은 고기를 먹었고, 발에 동상을 입은 채 경례를 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밸리 포지에서, 워싱턴은 철통 같은 훈련으로 군대를 다시 만들었다. 프리드리히 폰 슈토이벤, 독일 출신의 군사 교관이 도착해 군기를 다잡았고, 병사들은 눈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 겨울이 없었으면, 그 봄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2. 프랑스의 등장, 적의 적은 동지였다
1778년, 전쟁은 방향을 바꿨다. 미국은 아직 나라가 아니었고, 영국은 그들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미국을 주시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오래전부터 영국을 탐탁지 않아 했다. 7년 전쟁에서 뺏긴 땅에 대한 복수심, 유럽의 패권 다툼, 그리고 자유라는 단어의 신선함이 뒤섞였다.
벤저민 프랭클린. 회색 머리에 둥근 안경을 쓴 그 노인은, 파리의 살롱을 돌며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가 연주한 것은 바이올린이 아니라, 민중의 정의였고, 자유의 감각이었다. 결국 프랑스는 미국을 국가로 인정했고, 병력과 군자금, 해군까지 지원하게 된다.
프랑스의 개입은 게임의 룰을 바꾸었다. 이제 미국은 혼자가 아니었다.

 

3. 요크타운, 천천히 무너진 깃발
1781년, 전쟁은 끝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버지니아의 작은 항구 도시 요크타운(Yorktown). 영국군 총사령관 콘월리스는 해안가에서 고립되었고, 워싱턴과 프랑스군 로샹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해군은 바다에서 영국군의 보급을 막았고,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육지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열흘간의 포격. 그리고 10월 19일, 콘월리스는 백기를 들었다.
군악대는 “The World Turned Upside Down(세상이 뒤집혔다)”를 연주했고, 그것은 단지 음악이 아니라 선언이었다. 제국이 무릎 꿇었고, 식민지가 고개를 들었다.

 

4. 1783년, 파리에서 쓰인 새로운 이름
1783년, 파리. 외교관들이 둥근 탁자에 앉아 서로 다른 언어와 국적을 가진 손으로 조약서를 써내려갔다.
파리 조약. 영국은 13개 식민지의 독립을 공식 인정했고, 미시시피강까지의 영토를 넘겨주었다. 유럽은 고개를 끄덕였고, 미국은 비로소 지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식민지가 아니라, ‘합중국’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5. 헌법의 씨앗, 그리고 흔들리는 첫걸음
전쟁은 끝났지만, 나라가 바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은 각 주의 자율을 인정했지만, 너무 약했다. 정부는 세금을 걷을 힘도, 군대를 유지할 능력도 없었다.
1787년, 미국은 다시 모였다. 헌법 제정 회의. 필라델피아의 더운 여름날, 55명의 대표들이 모여 새로운 나라의 구조를 설계했다. 왕도 없고, 귀족도 없는 나라. 의회와 대통령, 사법부가 분리되고, 권력은 나뉘었다.
조지 워싱턴은 만장일치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789년 그는 조심스럽게 취임사에 입을 열었다.
이 나라는 이제 시작이었다. 총과 선언, 얼어붙은 계곡을 지나온 사람들이, 다시 펜과 글로 나라를 짓고 있었다.

 

제4장 영토 확장과 대서부 개척
1. 지도는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국경을 따라 걷지 않았다. 그들은 울타리를 밀고 들어갔고, 강을 건넜으며, 산을 넘었다. ‘미국’이라는 새 이름이 생겼지만, 그 이름은 아직 좁았고, 땅은 아직 멀었다.
해가 지는 방향을 향해, 사람들은 마차에 삶을 싣고 달렸다. 처음에는 열세 개 주였고, 곧 열일곱 개, 스물두 개. 미국은 걷는 이들의 발 아래로 확장되었고, 땀과 피를 따라 서쪽으로 길을 냈다.
지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늘 더 큰 땅을 원했고, 그 욕망은 서부로, 더 서부로 향했다.

 

2. 루이지애나 매입, 황금보다 값싼 대지
1803년, 토마스 제퍼슨은 펜을 들고 ‘한 나라의 배’를 설계하고 있었다. 그는 이상주의자였지만, 현실에도 강했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전쟁을 벌이느라 허덕였고, 북미에 대한 관심을 접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묻지 않았다. “이것이 헌법에 맞는가?” 대신, 그는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돈이 필요했고, 미국은 영토가 필요했다. 1,500만 달러, 금은 아니라도 나라의 절반이 팔렸다.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 이 거래로 미국은 한 번에 200만 평방킬로미터를 손에 넣었다. 미시시피강에서 로키산맥까지, 정복이 아니라 ‘계약’으로 얻은 땅이었다.
그 땅 위로 누가 살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조약서에 그들의 이름은 없었고, 앞으로도 쓰이지 않을 것이었다.

 

3. 루이스와 클라크, 무명의 지도 위를 걷다
토마스 제퍼슨은 종이에 도장을 찍고 나서, 사람을 보냈다. 메리웨더 루이스와 윌리엄 클라크. 이 두 사람은 말을 아꼈고, 땀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새 땅을 걷고, 언덕을 넘었고, 원주민과 불안한 악수를 나눴다. 그들이 만난 부족은 수십이었고, 말은 다 달랐다. 그러나 다만, 물어야 했다. 강은 어디로 흐르고, 산맥은 어디에서 꺾이며, 들짐승은 어디에 모이는가.
지도는 걸어 써졌다.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은 길에 줄을 긋고, 나무 사이에 국경을 상상했다.
미국은 그렇게 땅을 ‘알아갔고’, 알아간다는 말은 곧 ‘갖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4. 인디언, 나무 아래로 밀려나는 사람들
그들이 옮겨다니는 땅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을 ‘네이션’이라 불렀고, 사슴을 따라 살며, 강가에서 옥수수를 키웠다. 그러나 이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미국은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1830년,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법안에 서명했다. 인디언 이주법(Indian Removal Act). 말은 점잖았지만, 내용은 날카로웠다.
체로키, 촉토, 크리크, 세미놀…
그들은 애팔래치아 동부에서 밀려나 ‘약속된 땅’이라 불린 서부로 쫓겨났다.
강제 이주 중 수천 명이 굶주림과 병으로 죽었다.
이 역사는 ‘눈물의 길(Trail of Tears)’로 기록되었다.
누군가의 눈물이 되지 않는 개척은 없었다. 서부로 간 미국은 그 땅의 주인을 바꾸었고, 문화와 언어, 종교와 노래를 잊게 만들었다. 개척이라는 말은 어느새 정당함의 다른 이름이 되었고, 전진이라는 말은 침탈의 수사가 되었다.

 

5. 서부 개척의 신화, 황금과 총의 시대
1840년대, 사람들은 다시 서쪽을 향해 떠났다. 오리건 트레일, 캘리포니아 트레일, 긴 마차 행렬이 황량한 벌판을 가로질렀다. 땅은 넓었고, 누구나 그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되자, 상황은 폭발했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골드러시(Gold Rush)는 서부를 변화시켰다. 거칠고 빠른 도시들이 생겨났고, 손에 삽과 곡괭이, 허리춤에 리볼버를 찬 이들이 거리를 누볐다.
목동은 카우보이가 되었고,
보안관은 법을 세우고,
열차는 대륙을 가로질렀다.
1869년, 대륙횡단철도 완공.
아이오와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철마가 미국의 심장을 관통했다.
철도는 사람을 옮겼고, 사람은 땅을 뒤흔들었다. 공장에서 찍어낸 도끼가 산을 깎았고, 조약을 찢은 행정관들이 지도를 다시 그렸다.
‘프론티어’는 단지 땅의 끝이 아니라, 꿈의 시작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그 꿈은 누군가에게는 끝없는 도망이었고, 또 누군가에겐 지워진 고향이었다.

 

제5장 남북전쟁과 노예제의 종말
1. 같은 나라, 다른 시간 속의 두 지역
북쪽은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다. 증기기관이 굉음을 냈고, 철로가 도시와 도시를 이어줬다. 유럽의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들은 철강을 만들고, 재봉틀을 돌렸다.
남쪽은 여전히 목화를 키우고 있었다. 해가 뜨면 노예들이 들판으로 나갔고, 해가 지면 헛간으로 돌아왔다. 휘장 달린 농장 저택 안에선 파이프를 문 주인이 세금이 어떻고, 연방이 어떻고 하는 말을 했다.
하나의 나라였지만, 살아가는 방식도, 말투도, 생각도 달랐다. 북부가 자본과 기계를 쌓아가고 있을 때, 남부는 흙과 노예 위에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두 세계는 결국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2. 검은 사람들의 백 년의 기다림
노예는 사람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 나무 목걸이를 찬 채 경매에 섰고, 아이는 부모와 떨어졌으며, 아내는 남편보다 먼저 팔렸다. 목화밭에서 등을 구부린 채 하루를 버티고, 밤이면 흙벽 오두막에서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울음이었고, 믿음이었고, 또 한 번의 기다림이었다.
18세기 말부터 북부 여러 주에서는 노예제를 폐지했다.
그러나 남부는 “이건 우리의 경제”라며 버텼고,
자유와 평등을 말하던 나라가 두 얼굴을 가졌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노예에겐 들리지 않는 언어였다.

 

3. 링컨, 검은 양복을 입은 야망의 사람
1858년, 일리노이 주의 한 변호사가 연단에 섰다. 키가 크고 마른 몸, 검은 양복을 입고, 그늘진 얼굴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한 집이 서로 갈라져서는 설 수 없다.”
에이브러햄 링컨. 노예제를 직접 공격하지도, 남부를 비난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말은 전쟁의 서막이 되었다.
1860년,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남부는 기다리지 않았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11개 주가 탈퇴했고, 스스로를 ‘남부 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라 선언했다.
미국은 이제 두 개의 수도, 두 개의 국기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

 

4. 북군과 남군, 총구 끝에서 피어오른 연기
1861년 4월 12일, 새벽.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항의 섬터 요새에서 첫 포성이 울렸다. 전쟁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북군(Union)은 링컨과 연방 정부를 따랐고, 수도는 워싱턴 D.C.
남군(Confederacy)은 노예제를 유지하려 했고, 수도는 리치먼드였다.
북군은 인구도, 산업력도, 군수 능력도 우세했다.
하지만 남군은 초반의 전투에서 날카로웠고, 장군들은 노련했다.
전쟁은 빠르게 끝나지 않았다. 죽은 자는 백만에 달했고, 전선은 애팔래치아를 넘어 미시시피까지 뻗었다.

 

5. 노예 해방 선언, 말보다 먼저 움직인 시간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 해방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부의 노예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말이지, 실제로 풀어주는 조치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언은 강했다. 북군은 이제 ‘연방’만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우게 되었다. 흑인 병사들이 북군에 합류했고, 그들의 손에는 총이, 가슴엔 오래된 노래가 있었다.
전쟁은 단지 땅을 위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사람을 위한 것이 되었고, 정의를 위한 것이 되었다.
그 말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미국이라는 이름에 반드시 새겨져야 할 문장이었다.

 

6. 게티즈버그, 묘지에서 쓴 국가의 약속
1863년 여름, 펜실베이니아 게티즈버그(Gettysburg). 세 번째 날의 전투가 끝났을 때, 들판엔 만 명이 넘는 시신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링컨은 그 들판 위의 묘지 앞에 섰다. 그는 짧은 연설을 남겼다. 단 272단어. 그러나 그것은 미국의 심장을 다시 적는 말이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한 나라가 어떻게 다시 태어나는지를, 죽은 이들 앞에서 그는 선언했다.

 

7. 승리와 죽음은 같은 문 안에서 왔다
1865년 4월,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는 항복했다. 앱포매턱스(Appomattox)라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4월 14일 밤, 링컨은 극장에서 암살당했다. 그는 새 나라의 아침을 보지 못했고, 흑인 병사들은 그의 장례 행렬을 따라 노래를 불렀다.
전쟁은 끝났지만, 갈등은 남았다. 남부는 폐허가 되었고, 흑인은 여전히 투표할 수 없었으며, 평등은 선언뿐이었다.
새로운 미국은 태어났지만, 그것은 싸우는 나라였고, 아직 피가 식지 않은 나라였다.

 

제6장 산업화와 이민의 시대
1. 연기의 도시, 강철의 나라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피가 멎은 건 아니었다. 들판은 여전히 척박했고, 남부의 땅에는 탄환보다 많은 약속이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북쪽 도시들의 굴뚝은 쉬지 않고 연기를 뿜고 있었다.
석탄은 검었고, 철강은 뜨거웠다. 기계가 돌아가고, 톱니가 부딪히는 소리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피츠버그, 시카고, 뉴욕, 디트로이트… 이름도 다 기억 못 할 도시들이 늘어났다.
앤드루 카네기, 스코틀랜드 이민자 출신의 강철왕. 그는 철도와 다리를 짓고, 고층 건물의 뼈대를 만들었다. 존 D. 록펠러, 석유를 손에 쥐고, 나라의 에너지를 틀어쥐었다. 거대한 자본가들이 나라를 키웠고, 동시에 움켜쥐었다.
미국은 이제 공화국이 아니라, 자본의 왕국이었다. 기계는 잠들지 않았고, 인간은 점점 더 규격화되어 갔다.

 

2. 이민자들, 이름 없는 얼굴들의 대열
대서양을 건너 배들이 도착했다. 발밑에 가죽 가방 하나, 품 안에 이름 모를 고향의 사진 하나. 이탈리아, 아일랜드, 폴란드, 러시아, 독일… 셀 수 없는 사람들이 한 손에 희망을 쥐고, 다른 손에 절망을 안고 들어왔다.
그들은 엘리스 아일랜드에 도착했고, 신체검사를 받았고, 새로운 성씨를 받아들였다. 발음이 어려운 이름은 영어식으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고향말을 속삭이는 걸 점점 피했다.
벽돌을 나르고, 철도를 깔고, 고층 건물의 뼈대를 타고 올랐다. 낡은 장화와 닳은 손바닥, 그 위에 산업은 쌓였다. 그러나 이름은 교과서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인”이라 불리기 전, “이방인”이라 불렸다. 집세는 비쌌고, 일당은 적었으며, 실업은 흔했다. 그러나 누구도 돌아갈 수는 없었다. 고향은 이미 멀었고, 배는 오지 않았다.

 

3. 도시의 뒷골목, 땀과 빈곤의 교차점
공장의 사이렌은 새벽을 깨웠고, 뒷골목에는 먹지 못한 아이들이 맨발로 뛰었다. 방 하나에 다섯 가족, 한 냄비에 세 끼. 거리의 푸줏간과 맥주집, 그리고 영어와 이탈리아어, 러시아어가 섞인 저녁 거리.
사회는 성장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지는 않았다. 산업은 수직으로 성장했지만, 사람들은 바닥에서 숨을 참았다.
1900년대 초, 기자들과 작가들이 도시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제이컵 리스, 어프턴 싱클레어. 그들은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공장 안의 어린이들.
썩은 고기와 부패한 공무원.
철거되지 않는 가난의 구조물.
진보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세오도어 루스벨트, 그는 총보다 펜을 믿었다. 독점 기업을 해체하고, 노동시간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제도는 느렸고, 자본은 빠르게 회피했다.

 

4. 여성의 외침, 사회의 뒤편에서 앞으로
가정이라는 말이 울타리였다. 부엌이라는 말이 굴레였다. 그러나 도시화가 여성을 거리로 불러냈다. 공장에서 봉제를 하고, 병원에서 간호를 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녀들은 이제 돈을 벌었고, 입을 열었다.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이름조차 낯선 이들이 플래카드를 들었다.
“우리에겐 표를 줄 수 없다.”
“우리는 법을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세금을 낸다.”
1910년대, 여성 참정권 운동은 거리를 뒤덮었다. 남자들의 어깨너머로 글을 읽고, 제도를 파고들고, 결국 1920년, 투표권을 얻었다.
그날 밤, 누군가는 촛불을 켜고,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다시, 새벽엔 공장으로 나갔다.

 

5. 폭발의 기운, 노동자와 자본가의 전장
파업은 잦았다. 철도, 광산, 조선소, 항만. 불이 켜진 곳엔 언제나 분노가 자라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올려달라고 했고, 자본가는 경쟁력을 이유로 잘랐다.
총탄이 오갔고, 경찰이 투입되었고, 군대가 파업을 해산했다. 헤이마켓 폭동(1886), 풀먼 파업(1894), 그리고 수많은 기록되지 않은 이름들.
자유의 땅이라는 이름 아래, 입을 막히고, 때로는 쫓겨났고, 어떤 날은 죽었다. 노동조합이 등장했고, 마르크스의 책이 뒷골목에서 돌았고, 감시는 더 치밀해졌다.

 

6. 상승하는 미국, 불편한 위에서의 번영
그럼에도 미국은 성장했다. 산업 생산량은 세계 1위였고, 강철과 석유, 자동차와 전기가 도시를 채웠다. 헨리 포드는 자동차를 대량 생산했고, 시간당 임금을 높였으며, ‘미국식 생활’이라는 모델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번영의 기둥 밑에는 흙먼지와 굶주림이 묻혀 있었다. 인종 차별은 여전했고, 흑인들은 여전히 뒷문으로 드나들었으며, 이민자들은 범죄와 연관된 숫자로 불렸다.
20세기 초 미국은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지만, 그 문 너머의 골목은 늘 어두웠다.

 

제7장 세계 무대로의 도약
1. 깃발은 멀리 나부꼈고, 바다는 더 이상 막이 아니었다
19세기 말, 미국은 이미 대륙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동쪽의 바닷가부터 태평양까지, 지도 위에 빈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허기가 남았다.
그들은 바다 건너를 보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처럼 식민지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건 명분에 불과했다. ‘자유’와 ‘문명’이라는 단어는 너무 자주 반복되었고, 군함은 무역의 대사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 쿠바에서의 불씨는 필리핀까지 번졌다.
미국은 쿠바의 독립을 도운다는 명분으로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필리핀과 괌, 푸에르토리코를 ‘해방’시켰다며 가져왔다.
하와이는 그 와중에 병합되었고, 태평양은 더 이상 남의 바다가 아니었다.
‘자유를 위한 전쟁’이라는 구호 아래, 새로운 제국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2. 세계 전쟁의 문턱에서, 미국은 기다렸다
1914년, 유럽이 폭발했다.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로 시작된 불씨가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영국을 삼켰다. 제1차 세계대전.
처음에 미국은 그 싸움을 멀리서 지켜봤다. 우리는 유럽이 아니다, 우리는 고립주의의 나라다,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그렇게 말했고, 국민도 동의했다.
그러나 바다는 생각보다 좁았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 상선이 침몰했고,
1915년, 루시타니아호 사건으로 미국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1917년, 독일이 멕시코를 유혹하려 했다는 짐머만 전보 사건이 폭로되었다.
미국은 더 이상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그리고 윌슨은 말했다.
“세계는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해야 한다.”

 

3. 프랑스로 간 소년들, 기계와 진창의 전쟁
1917년 봄, 미국은 전쟁에 참전했다. 열일곱, 열여덟의 소년들이 총을 들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들은 프랑스의 참호에서 총성과 포성, 그리고 진창 속의 시체를 보았다.
전쟁은 영광이 아니었고, 그들에게는 혼란이었다.
독가스가 퍼졌고, 기관총이 쓰러뜨렸으며, 하늘에선 비행기가 불을 뿜었다.
그들은 말없이 싸웠고, 가끔은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1918년, 독일이 항복했다.
세계는 조용해졌지만, 그 침묵은 무겁고 불편했다.

 

4. 윌슨의 꿈과 베르사유의 현실
전쟁이 끝났을 때, 우드로 윌슨은 유럽으로 향했다. 미국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했고, 민족자결과 국제연맹을 주장했다. 윌슨은 제국주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세계 질서를 그리려 했다.
그러나 파리 베르사유 궁정의 회의실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복수심에 불타 있었고, 독일에 무거운 배상과 굴욕을 안겼다.
미국 상원은 국제연맹 가입조차 거부했고, 윌슨은 병석에 쓰러졌다.
그의 이상주의는 유럽의 오래된 골목에서 조용히 꺾였고, 미국은 다시 안으로 향했다.

 

5. 버블의 시대, 재즈와 낙관의 열기
1920년대, 미국은 바다를 건너온 피로를 잊고 싶었다.
거리는 밝아졌고, 전깃불은 밤을 낮처럼 만들었다.
재즈가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되어 뉴욕까지 올라왔고, 찰스 린드버그는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넘었다.
공장은 돌아갔고,
자동차는 보편화되었고,
월가는 끝없는 상승세를 탔다.
이 시대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 불렸다.
그러나 바닥에서는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부채는 늘었고, 농민은 빚에 쪼들렸고, 투자금은 실체 없는 종이에 쌓였다.

 

6. 검은 화요일, 무너진 믿음의 탑
1929년 10월 29일,
월스트리트가 무너졌다.
주가는 추락했고,
은행은 문을 닫았고,
실업자는 천만을 넘었다.
사람들은 쫓겨났고, 도시 외곽엔 천막촌이 생겨났다.
거대한 산업국가의 심장이 느릿하게 멈췄고, 신문은 그 날을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이라 적었다.
미국은 그토록 빠르게 달려왔지만, 그만큼 크게 넘어졌다.

 

7. 뉴딜, 루스벨트의 조심스런 손길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가난과 좌절을 보며 자랐으며,
마이크 앞에선 흔들림이 없었다.
“두려워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
그는 그렇게 말했다.
뉴딜(New Deal) 정책이 시작되었고,
공공사업이 일자리를 만들었고,
은행 시스템이 정비되었고,
노동자들은 조금씩 일어섰다.
뉴딜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새로운 정치의 방식이었다.
시장이 아닌 정부의 손이 사람들을 지탱하려 했다.

 

제8장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
1. 조용한 섬에서, 전 세계가 깨어났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하와이 진주만의 수병들은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있었고, 병기창엔 정비병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에서 수십 대의 비행기가 쏟아졌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항공모함 네 척이 불탔고, 전함 애리조나는 반쯤 물에 잠겼다.
2,400명이 죽었다.
다음 날, 루스벨트는 의회에서 입을 열었다.
“역사의 수치로 남을 날”이라 불린 그날, 미국은 참전을 선언했다.
태평양 전쟁은 시작되었고, 세계는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2. 두 개의 전선, 하나의 분노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양쪽에서 싸워야 했다.
유럽에서는 히틀러의 독일이 프랑스와 동유럽을 집어삼켰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만주, 중국, 동남아까지 쓸어내렸다.
전쟁은 단지 군사 작전이 아니었다.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이 탱크를 만들었고,
시카고의 여공들이 비행기의 날개를 꿰맸고,
흑인 병사들도 ‘우리를 위해 싸운 나라가 우리를 안아줄까’ 하며 총을 들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D-Day).
미국, 영국, 캐나다 연합군이 프랑스 해안에 상륙했다.
유럽의 해방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45년 5월, 히틀러는 자살했다.
독일은 항복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3.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침묵의 버섯구름
일본은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태평양의 섬 하나하나가 전장이 되었고, 병사들은 후퇴하지 않았다.
미국은 새로운 무기를 준비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뉴멕시코 사막에서 만들어진 원자폭탄.
루스벨트가 죽고, 해리 트루먼이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두 도시가 무너졌고, 수십만 명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일본은 항복했다.
세계 2차 대전은 그렇게 끝났다.

 

4. 승자의 얼굴 속, 새로운 전선
전쟁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미국은 유럽을 도왔다. 마셜 플랜으로 자금을 지원했고,
독일은 동과 서로 갈라졌다.
소련은 점점 더 강경해졌고, 유럽의 절반은 철의 장막 뒤로 숨었다.
1949년, 미국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만들었다.
그리고 같은 해, 소련도 핵폭탄을 성공시켰다.
세계는 이제 공포의 균형 위에 놓였다.
냉전(Cold War)의 시대였다.
직접 싸우지 않았지만, 대리전은 시작되었다.

 

5. 한반도에서 터진 전쟁, 조용한 참전
1950년 6월, 조용하던 한반도에서 총성이 울렸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미국은 유엔군을 조직했고,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했다.
중국군이 개입했고, 전선은 요동쳤다.
1953년, 전쟁은 멈췄지만 끝나지 않았다.
휴전선은 여전히 긴장으로 얼어붙었고,
미국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경찰이 되었다.

 

6. 가정의 천국, 그러나 의심의 시대
1950년대 미국은 겉으론 번영의 시대였다.
자동차는 가정의 필수품이 되었고, 텔레비전이 식탁을 지배했다.
냉장고, 전자레인지, 화이트펜스, 맥도날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들이 쏟아졌다.
그러나 안으로는 조용한 전쟁이 있었다.
매카시즘.
공산주의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수천 명이 감시당했다.
작가, 영화인, 교사들이 줄줄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자유의 땅이라 불리던 나라가,
자신을 의심하는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7. 우주로 간 전쟁, 냉전은 하늘도 차지했다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Sputnik)를 쏘아올렸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미국은 충격에 빠졌고, 학생들은 수학 교과서를 바꿨다.
1958년, NASA가 만들어졌고,
우주는 냉전의 새로운 전장이 되었다.
경쟁은 땅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달로,
그리고 인간의 두려움 너머로 확장되고 있었다.

 

제9장 인권운동과 사회 변화
1. 버스의 한 좌석, 혁명의 시작
1955년 12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하루 일과를 마친 흑인 재봉사 로사 파크스는 버스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중간 정류장에 멈췄고, 백인 손님이 올라왔다.
운전사가 말했다.
“일어나시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버스는 멈췄고, 경찰이 그녀를 데려갔다.
한 좌석의 거절이 도시를 멈추게 했다.
흑인들은 버스를 타지 않았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이름.
마틴 루서 킹 주니어.

 

2. 드넓은 광장, 울림이 남긴 메아리
1963년 8월,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피켓과 손잡은 손, 흑인과 백인, 아이들과 노인.
그들 앞에 선 킹 목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I have a dream…”
그날의 꿈은 단지 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약속이었다.
자유의 땅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더 이상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3. 법은 늦게 움직였지만, 움직이긴 했다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되었다.
인종에 따라 학교가 나뉘지 않아야 한다고,
식당과 화장실, 투표용지에서 차별을 금지한다고,
백악관이 적었다.
그 이듬해,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도 통과되었다.
흑인들이 처음으로 투표소에 줄을 섰다.
그들의 손에는 권리가 있었고, 눈엔 긴 세월의 그림자가 깃들었다.
그러나 골목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증오가 남아 있었다.

 

4. 여성의 이름으로 다시 쓰는 삶의 조건
전쟁이 끝난 뒤, 여성들은 공장에서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베티 프리던의 《여성의 신비》는 수많은 주부들의 벽장을 흔들었고,
여성들은 거리로 나왔다.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낙태와 피임의 권리
직장에서의 차별 철폐
여성의 권리는 이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화두였다.
그리고 여성은 더 이상 조용한 뒷모습으로 머물지 않았다.

 

5. 불붙은 캠퍼스, 침묵하지 않는 세대
1960년대 후반,
미국의 대학 캠퍼스마다 소리가 터졌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모였다.
꽃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깃발 대신 펜을 들었다.
켄트 주립대학에서는 총성이 울렸고,
네 명의 학생이 쓰러졌다.
정부는 침묵했지만, 젊은 세대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싸움의 방법을 바꾸었고,
저항의 정의를 새로 썼다.
히피, 반문화, 록 음악,
모두 그 시대의 또 다른 언어였다.

 

6. 킹과 케네디, 꿈의 끝에서 총성이
1968년.
멤피스의 발코니에서 킹 목사는 쓰러졌다.
그의 입에선 더 이상 꿈이 나오지 않았고,
수천 명이 침묵 속에서 눈을 떨구었다.
같은 해,
로버트 케네디도 총을 맞았다.
형 존 F. 케네디에 이어, 또 하나의 미래가 사라졌다.
희망은 짧았고,
어둠은 길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저앉지 않았다.
그들은 발을 들고, 다시 광장으로 나왔다.

 

7. 이름을 가진 모든 사람들
체로키의 후손들이 땅을 돌려달라고 외쳤고,
라틴계 미국인들이 이민자의 권리를 요구했고,
게이와 레즈비언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냈다.
장애인들이 경사로를 요구했고,
노동자들이 인간적인 시간을 원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 채워지고 고쳐져야 하는 집처럼 흔들렸고,
그 안에는 늘 새로운 이름들이 문을 두드렸다.

 

제10장 21세기 미국의 도전과 미래
1. 하늘에서 무너진 나라의 자존심
2001년 9월 11일.
그날 아침 뉴욕은 평소처럼 바빴고, 맨해튼의 거리엔 사람들로 붐볐다.
그러나 8시 46분, 비행기 한 대가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에 충돌했고,
그 17분 뒤, 또 한 대가 남쪽 타워를 찔렀다.
화염이 치솟고, 사람들은 빌딩에서 뛰어내렸다.
세 번째 비행기는 펜타곤,
네 번째는 승객들의 저항으로 펜실베이니아의 들판에 떨어졌다.
3천 명 가까운 목숨이 사라졌고,
미국은 자국 본토가 공격받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날 이후, ‘세계는 달라졌다’는 말이 유행처럼 퍼졌다.

 

2. 끝없는 전쟁,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다음 날,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전쟁을 선언했다.
표적은 알카에다와 그를 숨겨준 탈레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고,
세계는 또 다른 전장으로 눈을 돌렸다.
2003년엔 이라크를 공격했다.
‘대량살상무기’를 이유로 들었지만,
끝내 그 무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었고,
바그다드는 무너졌지만,
테러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중동은 혼란의 늪에 빠졌다.
미국은 전쟁을 이겼지만, 평화를 얻진 못했다.

 

3. 검은 피부의 대통령, 새로운 문을 열다
2008년, 금융위기가 세계를 덮쳤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월가의 도박,
은행이 무너지고, 주택이 빼앗기고, 사람들은 일터를 잃었다.
그 혼란 속에서
시카고 출신의 젊은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
그는 말했다.
“Yes, we can.”
그의 등장은 단순한 승리가 아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수십 년 전 ‘꿈’을 외쳤던
한 목사의 말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4. 차별은 지워지지 않았다, 거리의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피부색 하나 바뀌었다고
현실이 갑자기 달라지진 않았다.
2014년,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흑인 소년이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었다.
“손 들었어요, 쏘지 마요.”
그 문장이
트위터를 타고, 거리로 퍼졌고,
수많은 도시에서 시위가 이어졌다.
Black Lives Matter,
검은 생명도 소중하다는 외침은
다시 미국의 골목과 광장을 울렸다.
그리고 세계로 번져갔다.

 

5. 분열의 나라, 깃발 아래의 전쟁
2016년,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됐다.
부동산 재벌 출신의 예능인,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의 당선은 단지 우파의 승리가 아니었다.
미국 안의 분열, 지역, 인종, 계층의 균열이
표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이민을 막고,
국경에 장벽을 세우려 했고,
파리 기후협약에서 탈퇴했다.
한쪽은 환호했고,
다른 쪽은 경악했다.
하나의 미국은 더 이상 말하기 어려운 구호가 되었다.

 

6. 전염병, 침묵 속에서 퍼진 공포
2020년, 전 세계를 멈춘 것이 왔다.
코로나19.
거리엔 사람이 사라졌고,
병원엔 침대가 모자랐고,
수백만 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 와중에도 정치 싸움은 계속됐다.
마스크 하나를 두고도 싸웠고,
백신을 놓고도 음모론이 떠돌았다.
공포는 병보다 더 빨리 퍼졌고,
미국의 의료, 복지, 정보 시스템은
균열 속에서 숨을 헐떡였다.

 

7. 다시 돌아온 백악관, 그리고 여전히 흔들리는 길
2021년,
조 바이든이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 시절의 부통령, 노련한 중도파.
그러나 시대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은 다시 고개를 들었고,
총기 사고는 계속됐고,
기후 위기는 이미 ‘재난’이 되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힘을 키웠고,
미국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그 발밑은 흔들리고 있었다.

 

8. 미국, 그 이름은 아직 ‘진행 중’이다
미국은 여전히 가장 많은 돈과 가장 강한 군대,
가장 큰 기업과 가장 유명한 문화,
가장 많은 영화와 가장 논란 많은 정치인을 가진 나라다.
그러나 그 안에서 사람들은 묻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자유, 평등, 기회,
그 오래된 단어들을
미국은 아직도 붙잡고 있다.
때로는 지키고,
때로는 외면하면서.
미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역사는 여전히,
지금도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