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 왕의 길을 걷다 검은 눈을 번뜩이며 세상을 품에 안은 한 사내가 왕좌에 앉았다. 그의 이름은 광종, 고려 제4대 왕. 그는 왕건의 손자였고, 강한 왕이었다. 그러나 강함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고려를 다듬어야 했고, 그 자신도 변해야 했다. 광종이 왕위에 오른 것은 949년이었다. 그가 본 고려는 하나가 아니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지 불과 1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통일은 이름뿐이었다. 호족들은 여전히 각자의 땅을 지배하고 있었고, 왕은 그들을 인정해야만 했다. 왕권은 허울뿐이었다. 광종은 그 허울을 벗겨내기로 했다. 그는 왕이 아니라, 고려 그 자체가 되고자 했다. 노비안검법, 권력을 위한 칼날 그가 먼저 손을 댄 것은 호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을 쓰지 않았다. 칼이 아니라 법으로 그들을 베었다. 그 법의 이름은 노비안검법이었다. 고려의 호족들은 전쟁 속에서 노비를 늘렸다. 전쟁은 끝났어도, 그들의 노비는 줄지 않았다. 많은 백성들이 빚을 갚지 못해 스스로 노비가 되었고, 호족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겼다. 광종은 그것을 부정했다. 나라가 하나라면, 백성도 하나여야 한다. 그의 명령이 떨어졌다. 조사관들이 전국으로 퍼졌다. 호족들의
고려 태조 왕건(王建) – 한 사내가 이룬 나라 세상에는 이름만으로도 시대를 상징하는 자들이 있다. 왕건(王建), 그 또한 그러한 이름이었다. 신라의 기운이 다하고, 후삼국이 어지럽게 엉켜 있던 시절, 그는 어둠을 뚫고 한 시대를 연 사내였다. 단순한 장수가 아니었고, 그저 운이 좋은 자도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세우고, 그 왕조를 천 년 동안 이어지게 한 사내였다. 무너지는 시대, 떠오르는 별 왕건은 877년, 고려 개국 이전의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태어났다. 당시 신라는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세력가들이 스스로를 호족(豪族)이라 칭하며 땅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신라의 힘은 경주의 궁궐 담장을 넘지 못했고, 나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그런 틈을 타 후백제의 견훤(甄萱), 태봉의 궁예(弓裔) 등이 일어나 스스로 왕을 칭하며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했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왕건은 본래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 출신으로, 아버지 왕륭(王隆)은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단순한 상인의 자식으로 끝나지 않았다. 궁예가 태봉을 세우고 세력을 키워갈 무렵, 왕건은 그의 휘하에서 뛰어난 용맹과
후삼국 통일, 고려․․․통합의 리더십 역사의 물결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300여 년, 한반도는 다시금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통일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고, 신라는 쇠락했다. 그리고 강한 자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스스로 왕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900년대 초,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혼돈의 시대, 왕이 된 자들 신라는 더 이상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중앙의 권력은 무너졌고, 지방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 힘을 키웠다.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고,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했다. 견훤은 야심가였다. 백제의 후예를 자처하며 신라를 몰락시킬 계획을 세웠다. 강한 군대를 갖추었고, 전라도와 충청도를 장악했다.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궁예는 신비로운 인물이었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처음에는 이상적인 군주였다.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펼쳤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모습은 변했다. 독선과 폭정으로 백성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918년, 부하들은 결국 그를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왕건이었다. 고려의 시작, 왕건의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과 외교, 그리고 강한 자의 조건 역사는 말한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강한 자란 무엇인가. 군사력인가, 외교력인가, 시대를 읽는 통찰력인가. 신라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졌다. 그리고 그 모든 요소가 합쳐졌을 때, 676년, 신라는 마침내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신라가 이룬 통일은 진정한 통일이었는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라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삼국 통일, 그 시작은 배신이었다 7세기 중반. 한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세 나라가 서로를 견제하며 팽팽한 긴장 속에서 버텨왔다. 고구려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광활한 영토를 가졌고, 백제는 해상 무역과 뛰어난 문화적 역량으로 존재감을 키웠다. 신라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신라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강한 적과 맞서기보다 더 강한 힘을 등에 업기로 한 것이다. 태종 무열왕(김춘추)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국이던 당나라와 손을 잡았다. 국익을 위해 오랜 동맹이었던 백제를 배신했다. 66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무너뜨린다. 백제 의자왕은 항복했고, 사비성은 함락되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진정한 승자는 마지막까지 살아
흔들리는 왕좌, 혜공왕 신라 제36대 왕, 혜공왕. 왕이라 불렸으나 왕이 아니었다. 왕좌에 앉았으나 권력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신라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시대는 어지러웠고, 권력은 피를 부르며 흔들렸다. 그는 그 모든 격랑 속에서 오직 허수아비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뜻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힘이 없었고, 그를 지켜줄 이도 없었다. 끝내, 그는 역사의 한 귀퉁이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그는 한 번이라도 온전히 신라의 왕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어린 왕, 왕좌에 오르다 혜공왕은 어렸을 때 왕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경덕왕이 세상을 떠나면서, 왕좌는 단숨에 그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왕의 자리가 아니었다. 왕권이 약해지고, 귀족들이 힘을 키우던 시대였다. 어린 왕이 즉위하자, 실권은 왕이 아니라 귀족들이 가졌다. 신라는 이제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었다. 왕은 허울뿐이었고, 진짜 권력은 궁궐 밖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혜공왕은 왕이었지만,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나라의 정책은 귀족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고, 왕이 아닌 대귀족들이 나라를 움직였다. 신라는 혼란스러웠고, 왕권은 점점 더 흔들렸다. 그는 그것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그러나 그가
별을 세운 왕, 원성왕 먼 산자락에는 구름이 걸려 있었고, 남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천 년 전에도, 지금도. 하지만 바람이 전하는 이야기는 변하지 않았다. 그 시대의 이름이, 신라의 한 왕이 바람 속에서 조용히 속삭이고 있었다. 원성왕(元聖王). 그는 혼란의 시대를 살았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왕위는 피바람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했다. 왕이 바뀔 때마다 귀족들은 충성을 갈아타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았다. 그런 시대에, 그는 왕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또 다른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혼란의 시대를 뚫고 왕이 되다 원성왕은 신라의 38대 왕이었다. 그의 즉위는 단순한 왕위 계승이 아니었다. 통일 후 신라는 왕권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열왕계와 문무왕계의 혈통이 엇갈리며 왕위 다툼이 계속되었고, 진골 귀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그 와중에, 그는 왕이 되었다. 스스로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했고, 왕이 된 후에도 끊임없이 정적을 견제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권력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았다. 신라가 더 이상 왕위 다툼에만 휘둘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라가 다시 강해지려면, 새
바다를 지킨 왕, 신라 문무대왕 동해의 푸른 물결 위로, 천 년을 넘은 파도가 다시 밀려온다. 그 물결 속에는 한 왕의 혼이 잠들어 있다. 뭍이 아닌 바다를 자신의 안식처로 삼은 왕. 신라를 삼국통일로 이끈 군주, 그러나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을 것을 예견하고 스스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려 했던 왕. 그의 이름은 문무왕(文武王). 그는 신라의 왕이었고, 전쟁의 한복판에서 칼을 들었던 군주였다. 그러나 칼보다도 더 깊은 것은 그의 뜻이었다. 통일의 문을 열었으나, 그 문 너머에는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바다가 되어, 끝없이 흐르는 물결이 되어 신라를 지키려 했다. 전쟁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다 문무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라의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태종 무열왕 김춘추,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언제나 신라 최고의 장군 김유신이 있었다. 아버지가 길을 열었고, 김유신이 칼을 들었으며, 그는 그 길의 끝을 마무리했다. 그가 왕이 되던 661년, 신라는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백제는 멸망했지만, 부흥군이 일어나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고구려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당나라가
칼과 별, 그리고 신라의 길 – 김유신 경주의 들판을 스치는 바람은 천 년 전에도,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 바람 속에는 누군가의 숨결이 남아 있다. 말을 타고 대지를 달렸던 사내, 칼을 들고 신라를 지켜낸 장군, 삼국통일의 문을 연 영웅. 그의 이름은 김유신(金庾信). 신라는 그의 칼끝에서 운명이 결정되었고, 그가 남긴 길 위에서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는 장수가 아니었으면 왕이 되었을지도 모를 사내였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되지 않았다. 대신 신라를 삼국 중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화랑에서 장군으로, 신라를 짊어지다 김유신은 화랑이었다. 단순한 무사가 아니라, 신라의 정신을 배운 자였다. 화랑도는 그저 군사 조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라를 지탱하는 기둥이었고, 젊은이들에게 나라를 위한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곳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말 타는 법을 배우고, 칼을 들었으며, 신라의 하늘과 땅을 익혔다. 그가 처음 이름을 떨친 것은 백제와의 전투에서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그는 늘 선봉에 섰다.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 부하들을 이끌고, 피 흘리며 싸웠다. 그러나 김유신은 단순한 무장이 아니었다. 그는 전쟁을 어떻게 이길 것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
하늘의 별을 보다, 신라 선덕여왕 신라의 궁궐 기와 위를 스친 바람은 황룡사의 누각을 어루만졌다.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의 흐름을 읽고, 세상의 변화를 예감했다. 남자들만이 왕이 되던 시대였다. 그러나 그녀는 왕이 되었다.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 그녀는 칼을 들지 않았지만, 전쟁보다 더 어려운 싸움을 해야 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위협 속에서, 신라를 지키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을 읽고, 세상을 다스렸다. 여왕이 된다는 것 그녀가 왕이 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신라는 왕권이 강해졌지만, 여전히 귀족들이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왕의 혈통이었어도 여자라는 이유로 왕이 되지 못하던 시대. 하지만 선덕은 달랐다. 법흥왕과 진흥왕이 닦아 놓은 강한 신라, 그 기반 위에서 그녀는 왕이 되었다. 남자들은 불만을 가졌다. 왕은 칼을 들고 전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전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지켰다. 그녀는 지혜로 싸웠고, 예지로 다스렸다. 신라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하늘을 읽고, 미래를 예견하다 선덕
영토를 넓히고 길을 닦다, 신라 진흥왕 오래전 한 사내가 거센 바람을 맞으며 산을 올랐다. 높은 곳에서 멀리까지 신라의 땅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나라가 더 넓어져야 한다고. 신라의 왕이라면, 백성들이 갈 길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그 사내는 바로 진흥왕(眞興王). 그는 단순한 왕이 아니었다. 신라의 지도를 다시 그렸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주기 위해 길을 닦았다. 그가 만든 길 위에서 신라는 걷고 또 걸어 결국 삼국을 통일하는 나라로 나아갔다. 영토를 넓히다, 신라의 경계를 새로 그리다 진흥왕이 즉위했을 때 신라는 아직 작은 나라였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왕권을 세웠지만, 신라의 힘은 충분하지 않았다. 삼국은 서로 싸우고 있었고, 백제와 고구려는 이미 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달랐다. 그는 신라가 더 이상 작은 나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백제의 영토를 빼앗았다. 한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의 중심지였고, 물자가 오가는 길이었으며, 삼국이 모두 탐내는 땅이었다. 진흥왕은 그 땅을 차지함으로써 신라를